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라크 (문단 편집) ==== 카라크 반란 ==== [[파일:카라크 요르단 2.jpg]] 반란 진압 후 카라크 사라이 앞에서 오스만 장교들의 기념 촬영 오스만 조정의 중앙 집권을 싫어하던 아랍인들은 1908년 [[청년튀르크당]]의 혁명 이후 추가적인 세금과 징병을 도입하자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요르단 지방에서는 거의 반세기 가까이 중앙 집권력이 미치던 아즐룬과 [[살트]]에서는 반발이 없었지만, 중앙 지배가 20년이 채 안된 남부 마을들에서는 거부감이 컸다. 그중 카라크에서도 다마스쿠스 총독 사미 파샤가 무장해제와 주민 등록을 요구하자 반발이 있었다. [[베두인]]들의 습격에 맞서 무기가 필요하다는 주민들의 요청에도 당국은 듣지 않았고, 징병에 대한 의혹에 그저 주민 등록을 한다고 답하면서도 군대를 파병하며 현지인들의 의심을 증폭시켰다. 1910년 12월 4일 주민들은 카드르 마잘리의 주도 하에 봉기하였고, 인근 마을들과 헤자즈 철도역들에서도 호응하였다. 군중은 시리아 상점을 약탈하였고, 오스만 주둔군은 케라크 성채로 피신하였다. 주민들은 사라이 (시청)의 무기고로 몰려가 무장한 후 오스만 은행 지부, 행정 청사, 감옥, 법원, 저택, 심지어 모스크에까지 방화하였다. 10여일 후 사미 파샤는 다마스쿠스 주둔군과 당도, 무차별적인 학살과 지도부의 처형으로 반란을 가혹히 진압하였다. 주민들은 모든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납부해야 했고, 수백여명은 다마스쿠스의 수감되어 수년 간의 강제 노역 혹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세기 후반부터 회복하던 카라크의 인구와 경제는 이로써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비록 1912년의 대사면으로 모든 수감자들이 석방되었지만 여전히 그 잔혹함을 기억하던 주민들은 1916년 아랍 대반란 당시 봉기군을 크게 지지하였고, 오스만 주둔군을 학살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