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미카제 (문단 편집) === 일본의 경우 === 전략적 의미에서 보자면 대본영을 위시한 군인/관료/재벌들의 체면과 기득권을 잠깐이라도 더 유지해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자살 공격이었을 뿐이다.''' 다른 방송도 아닌 '''[[NHK]] 특집 다큐멘터리'''에서도 지적한 내용이다. 전략적 의미고 뭐고 일본은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전력이 궤멸당해버렸기 때문에, 이성적인 군대 및 국가였다면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윤리적이고 최선의 선택지는 항복을 전제로 미국에 대한 종전 협상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한국의 입장에서는 끔찍하지만)--[* 사실 미국은 일본이 종전, 휴전을 요청하였어도 받아줄 의향이 없었다. 만약 미국이 종전 협상에 응했다고 한들 태평양 전선에서 입은 막대한 피해, 제국주의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일본에게 일부 민주화를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치 독일|독일]]에 의해 수많은 자국민의 희생이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주의, 제국주의를 존치하는 것은 미국이 절대 응해줄 이유도 없다.] 일본 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식민지의 일부를 보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물적 및 인적 자원을 소모해 버린 일본 군부는 최소 이에 대한 책임으로 실각하여 완전히 권력을 잃어버리거나 최악의 경우 전범으로서 처형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의 보전을 위해 일본 국민 전원을 수렁으로 같이 끌고 들어가는 것을 선택하였다. 애당초 나치 독일의 주요 인사들이 그랬듯 이미 전쟁의 승패보다는 책임 회피와 자기 보전밖에 관심이 남지 않은 일본 군부의 눈에 그런 것이 보일 리가 없었다. 이들은 외교관 등 그나마 일본의 제정신 박힌 사람들이 "이제 다 끝났으니 인정하고 항복하자"고 했을 때도 '''"1억[* 여기서 사용된 '1억'이라는 숫자는 본 제국의 머릿수를 강조하던 숫자였는데 여기에는 식민지 조선 및 대만의 인구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일본 열도의 인구는 약 7천만.]을 다 죽여서라도 항복할 수는 없다"'''며 자존심을 세우는 시늉만 하다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핵 맞고]] [[천황]]이 항복하자 핵심 주모자로 미군에 처형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로 자신들의 지위 보전을 대가로 미군과 협조하여 살아남아 패전의 책임을 부정하고 패배한 전쟁의 망령이 되었다.''' 즉 일본 군부는 [[군국주의]]의 말로가 대부분 그렇듯, 국민을 지키기 위한 군대가 아니라 천황을 명분으로 삼아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국민을 이용했던 집단이었을 뿐이다. 이들은 미 해군의 본토 상륙을 막고 미군을 지독한 소모전으로 끌고가면서 비이성적인 전쟁을 지속하면 미군이 제풀에 나가 떨어질 것이라고 믿었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모든 일본의 국민이 저항한다는 의지를 표현한다면 설령 미군이라도 인종 절멸이라는 비윤리적인 가치를 위해 일본에 상륙하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라 오판했다. 그렇게 전략적 목표로 미 해군의 지연과 일본 본토의 방어를 목표로 하였기에 카미카제나 그 외 자살성 공격에 더 큰 투자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미군은 일본군이 비인간적 행위를 지속할 때마다 전의를 상실하기는 커녕 더 불태웠으며, 일본인을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닌 절멸시켜야 할 동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났다. 그리고 이런 일본 군부의 안이한 판단에서 나온 비윤리적 전술들이 미국에서 대서특필 될수록 미국에서 전쟁에 대한 지지는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결국 일본 군부의 자신들의 보신을 위한 객기에 대한 화답으로 미군은 [[몰락 작전]]의 입안과 2번의 [[원자폭탄|버섯구름]]을 일본 본토에 피움으로써 답변하였다. 결국 '카미카제'란 '''일본 군부의, 일본 군부에 의한, 일본 군부를 위한, 일본 군인들에 대한 자폭명령'''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일본 군부는 핵심적인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가담자들도 전범재판에서 사형까지 간 경우가 드물었고, 문화권이 다르기에 당장의 관료가 필요했던 [[더글러스 맥아더]]의 GHQ는 사형되거나 종신형을 받은 주요 전범들을 제외하고 상당수를 다시 등용하면서 책임이 희석되었다. 일본 군부에서 알량한 자기 목숨을 가지고 [[할복]]을 하거나, 간에 씨알도 안 먹힐 [[도게자]]라도 한 책임자들은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은 종전 후에도 미군과 협조 아래 잘 먹고 잘 살고 출세도 했으며 카미카제로 죽인 부하들 팔아먹으면서 [[극우]] 행세로 잘 살면서 패전의 망령으로 살았다.''' 실제로 정치계에 진출하거나, 패전의 절망을 자극하는 우익적인 책을 저술하여 돈을 버는 경우도 있었다. 1945년 일본의 상황은 누가 보아도 [[데꿀멍|닥치고 항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그리고 '''상대국이 자국의 완전한 파멸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점은 의외로 중요하다. 만일 미국이 [[코버넌트#s-2|'일본의 멸망'을 목표로 했다면]] [[콜 교전 수칙|무슨 수를 써서든 마지막까지 저항하려 한]] 일본의 행동은 타당성이 있다. 그렇지만 미국은 그저 일본의 항복 및 식민지 포기를 원했을 뿐이다. 일본의 수뇌부 역시 모르진 않았겠지만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보신, 그리고 천황의 안위를 위해 자국민에게 미국과 영국을 [[귀축영미]]라고 표현하면서 자국민에겐 마치 이들이 일본의 완전한 파멸을 바란다는 듯한 프로파간다적 선동을 했고 사정을 알 리 없는 많은 일본인들이 이에 선동되어 '''"[[설레발|항복하면 우리는 무자비한 미국인들에게 다 죽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이러한 자살 공격에 이용당했다. 오히려 이런 것 때문에 [[몰락 작전]]이 추진되었다. 비록 [[윌리엄 홀시]]가 '''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말이 될 것이다'''라고 했지만, 그때는 미국 전역이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분노에 가득 찬 상태였다. 정확히는 진주만 공습 [[12월 8일|뒷날]]이었다.][* 하나의 국가를 완전히 제거하고 민족을 멸종시켜 버리는 목적의 전쟁이라는 게 뭔가 굉장히 말이 안 되는 상황 같아 보이지만 사실 '''바로 지구 반대편에서 [[소련|상대방]]을 [[나치 독일|남김없이 말살해 버리려고 하는 나라]]가 [[독소전쟁|전쟁]]을 해 수천만 단위의 사망자를 낳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를 남김없이 말살하려고 쓸데없는 [[전쟁범죄]]를 벌인 결과 그 [[소련|말살당할 위기에 처한 나라]]에 반감을 가진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려서 상대가 [[바르바로사 작전|전쟁 초반에 400만의 병력을 잃고 산업능력의 반 이상을 잃어버렸어도]] 말살당하기 싫어 그야말로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쳐 [[모스크바 공방전|필사적으로]] [[레닌그라드 공방전|저항하게 만들었고]] 끝내 [[쿠르스크 전투|전세가]] [[스탈린그라드 전투|뒤집혀]] [[나치 독일|자기들을 말살하려 한 나라]]는 [[바그라티온 작전|역으로]] [[베를린 공방전|박살나 버렸다.]] '''어처구니없는 건 정작 [[소련|진짜 말살당할 뻔했던 나라]]는 이딴 개막장 자살공격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 조국을 재건하기 위한 젊은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하는 것이 위정자들의 의무다. 더구나 자동차 [[운전면허]] 소유자도 그리 많지 않았던 일본에서[* 이와 관련하여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미국을 자동차로 여행하던 야마모토가 차가 퍼진 적이 있었는데 누가 보아도 여고생(!!!)에 불과한 미국인 소녀가 공구를 들고 와 자신의 자동차를 수리해 주는 것을 보고 기겁한 것이다. 당시 자동차는 지금보다 잔고장이 많았고 기계적으로 직관적이여서 자기 집 차고에서 고치는 경우가 흔했으며 자동차마다 커다란 공구함으로 중대고장이 아니면 대충 뚝딱 수리해서 타고 다녔대다. 미국의 차고문화도 이것에서 기인하며 당시 남성들의 보편적인 주말일과 중 하나가 자동차 수리였다고 한다. 저 여고생도 [[지나가던 ○○○]]과 같이 우연히 옆을 지나가던 기계 공학의 천재거나 MIT를 졸업한 공업 유망주와 같은 엘리트 자원이 아니라 그냥 기계에 관심이 많거나 자차를 가진 단순한 시민일 확률이 크다는 것. 즉 자원의 차이 이전에 '기계'에 익숙한 사람이 이토록 수두룩한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면 백전백패라고 느꼈다 한다. 실제로 미국의 이러한 저력은 전시 체제로 들어서자 1~2년 후 익히 알려진 '쇼미더머니'의 전설을 찍어내었다. 대표적인 예시로 전체 인구 1억 3천만명 중 10% 정도에 해당하는 1200만명의 사람들이 현역으로 복무하면서도 산업역량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 많고 많은 성인들이 군대에 입대했는데도 미국의 산업역량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인재들이 남았다는 뜻이다''' ] '미숙하게나마 비행기 조종이 가능한' 젊은이가 지니는 의미는 상상 외로 큰 것이다. '''군사전략 이전에 정치전략적으로 도저히 정식으로 시행되어서는 안 되었던 선택지가 카미카제였다.''' 심지어 이때 징집된 파일럿 대다수는 대학교 재학생, 졸업생 등 고등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었다. 1960~70년대 대한민국만 해도 대학교 나오면 출세가 보장되고 엘리트로 인정을 받았는데 1930~40년대면 오죽하겠는가? 그땐 대학도 얼마 없었다. 그나마 미국이 일본을 항복시키려고만 했을 뿐 일본인 자체를 멸종시키려 들지는 않았고 결정적으로 무지막지한 미국의 자본이 일본에 흘러 들어가게 된 원인인 '''[[6.25 전쟁]]'''이 일어났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런 막장짓 한 번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재건이 영영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한 예로 위에 언급된 오가와 소위와 도미야스 중위는 둘 다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출신이다. 이런 인재들은 인간폭탄으로 쓰지 않았다면 전후 부흥기에 일본사회에 엄청난 도움이 될 사람들이었다. 만일 일본이 원폭을 맞고도 항복을 하지 않고 끝까지 [[결호작전|1억 총옥쇄]]를 계속해서 주장했다면 연합군 측은 일본 본토를 향해 총공격을 하는 계획인 [[몰락 작전]]을 진행했을 것이고 그렇게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맞이했을 것이며 [[윌리엄 홀시|모 제독의 말마따나 일본어는 저승에서나 들어볼 수 있는 언어가 되었을 것이다.]][* 저 [[결호작전|1억 총옥쇄]]를 주장한 건 천황인 [[쇼와 덴노]]가 아니라 군부다. 히로히토는 1945년 3월의 [[도쿄 대공습]] 이후 사실상 대본영 자체에서 손을 떼 버렸다.] --아니면 일본이 [[전멸|무인도가 되어버렸겠지]]-- 결론적으로 일본군이 전략적으로 카미카제를 통해 유의미한 결과를 얻은 것은 없을 뿐더러 그 일본군 스스로의 전략 목표를 고려하여도 그들이 카미카제를 통해 얻어낸 성과는 '''전략적인 건 하나도 없다.''' 결국 자신들의 보신을 위해 헛된 망상을 품고 아무런 대책없이 카미카제라는 지연책을 시행한 결과, 최종적으로 일부의 지위 보전이라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성과 외에는 그 어떤 유의미한 성과도 없고 결국 카미카제는 일본에게 어떠한 전략적 성과도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