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미카제 (문단 편집) ==== 대전략의 오류 - 항공 격멸전의 한계 ==== 결론부터 말하자면, 카미카제가 통상 공격보다 효율이 좋다(?)는 결론 자체가 [[제공권]] 확보를 등한시한 [[폭격기무적론]]과 [[함대결전사상]]이 맞물린 후진적 결과물에 불과했다. >이번의 기술과 상황으로는, 해군은 항공 전력 운용의 원리원칙을 지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육군은 항공 운용의 원리원칙을 제쳐두고 신속한 임기응변으로 전황에 대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번 사례에서는, 신속한 임기응변으로 대응한 육군의 손을 들어줄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하지만 역사를 조사해 보면, 해군처럼 눈 앞의 이해에 사로잡히지 않고 원리원칙을 지킨 것으로 최종적인 승리를 얻은 사례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생이 육군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 >해군은, 1944년 이후 침공해오는 미 함대와 수륙양용부대를 요격함에 있어. 함대의 주 전력인 기동부대의 항모, 특히 정규 항모를 공격 목표로 삼는 것을 고집했습니다. 그에 비해 육군은, 해병대나 육군 병사를 수송하는 수송선을 공격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미 기동부대의 방공능력으로는 그 방공망을 돌파해 방공망의 중심에 위치하는 항모를 공격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또한, 미 기동부대의 내습은 해병대, 육군의 육상 병력과 함께 그 작전 목적인 요지(구체적으로는 도서지역)을 공략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하지만 기동부대와는 달리 수송선단의 직접호위는 정규 항모와 비교해 소형인 호위항모 등의 비교적 취약한 전력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엄중히 방어된 기동부대의 정규 항모보다 공격 성공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육상 전력에 큰 피해가 나오거나, 상륙한 육상 전력에 대한 보급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요지 점령 목적은 달성 불가능합니다. 적의 작전 목적을 저지한다는 의미로 보면, 육군의 견해가 목적에 적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에 비해, 해군은 '[[함대결전사상|적 함대의 주력을 격파하면, 그 재건에 시간이 걸려 전쟁 지속이 곤란해진다. 그러니 적의 주력을 공격한다]]'라는 생각을 러일전쟁의 승리로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 가상적이 미국으로 바뀐 이후에도, 이 생각은 유지됩니다. 이 점에서 보아 해군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주적을 격멸한다는 것에 총력을 기울인 것이 됩니다. 또한, 진주만 공격까지는 그 주적은 전함이었지만, 미드웨이 해전 이후 그 주적은 항모가 됩니다. 전쟁의 양상이 변화했는데도 불구하고, 종래의 발상이 거의 고정관념화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해군이 항공운용의 원리원칙을 지킨 것은 어떤 의미로는 종래의 관념에 사로잡힌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한편 육군에서는, 육군항공의 중견 클래스 즉 전문가의 반대를 억누르면서까지, 전투기 초중점주의로 이행했습니다. '현재의 우리 나라의 기술력에 기반하는 전력으로는 연합국군에 대항할 수 없다. 연합국보다 질, 양 모두 열세인 전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조금이라도 불리점을 개선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라는 판단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결과 '지상군을 줄여서라도 항공부대를 확충한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의 전훈을 반영해, 요원 양성이나 기재 생산이 비교적 용이하고 전장 상공의 항공우세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전투기에 중점을 둔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 >― 후술하는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의 저자가 [[날개회]]에 기고한 요약문에서 발췌 카미카제 전술은 주로 일본 해군에 의해 시행되었다. [[오키나와 전투]] 즈음에 달해서는 육군도 항공기를 이용한 특공을 시도했지만, 적어도 일본 육군은 항공전에 있어서는 그저 항속거리와 기습에만 신경쓰면서 구시대적 교리를 발달시키지 아니한 일본 해군에 비해 선진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폭격기무적론]]이 내세운 주장과는 달리 항공기에 의한 공격은 [[호위기|전투기의 호위]] 및 제공권 확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적 전투기에 매우 취약하며 이는 [[영국 본토 항공전]] 등 수많은 실전에서 검증되는 바,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http://www.nids.mod.go.jp/publication/senshi/201203.html|#]][* 2023년 11월 현재 한국에서는 방위성 방위연구소 홈페이지가 접속되지 않는다. [[https://iss.ndl.go.jp/sp/show/R100000001-I056320948-00/|목차]] ][[http://www.tsubasakai.org/Senshi_Kiji_283HP_000.htm|#요약문]] [[https://web.archive.org/web/20191228120644/http://wgforum.kr/kancolle_war_museum/7431186|요약문 번역 아카이브]] 는 대전기 일본 해군의 항공 운용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육군은 중일전쟁과 42년 남태평양에서의 항공 소모전을 겪으면서 폭격기의 높은 소모율과 능력의 한계를 실감한 후 전투기 중점 체제를 비교적 이른 시기에 확립하게 된다. 43년 9월부터 육군은 지상군을 줄여서라도 항공 전력 확충에 집중하며 폭격/공격기보다 탑승원 육성 및 생산이 용이하고 전장 상공의 항공 우세를 획득할 수 있는 전투기에 중점을 두기로 결정하고, 항공 병력을 약 2.5배 확충하는 한편 일명 '전투기 초중점주의' 에 입각한 신규 교범을 작성, 전투기:폭격기:[[급강하폭격기|습격기]]:정찰기:수송기의 비중을 56.4 : 8.4 : 7.7 : 12.8 : 15.4로 맞출 것을 계획한다. 그렇다고 육군이 카미카제나 특별 공격대를 안 쓴 건 아니지만,[* [[Ki-115 츠루기]]가 육군이 썼던 카미카제 전용기다. 그러나 아무리 일본군 상층부라도 연합군의 신형기와 싸우거나 [[B-29]]를 요격할 수 있는 2,000마력급 고성능 전투기를 카미카제로 돌리지는 않는다. 해군조차도 시덴카이나 라이덴은 특공기로는 쓰지 않았다.] 단순히 탁상 위의 계획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육군에서는 전투기를 중시한 전력 개편이 이루어져 대전 기간 중 육군이 생산한 전투기는 13,700기, 그중 43년 이후의 신형기가 6,800기, [[Ki-84 하야테|2,000마력급 고성능기]]가 3,500기였다. 반면 해군은 43년 8월까지 벌어진 남태평양의 항공 소모전을 겪고도 체질 개선에 실패해, 해군의 총 전투기 생산량은 12,300기로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것 같지만 그중 1만기 이상이 '''대전 초반 티어 전투기'''인 [[A6M]] 제로센이었고, 43년 이후의 신형기 및 [[N1K-J 시덴|2,000마력급]] [[J2M 라이덴|고성능기]]는 1,900기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 중 1천기를 차지하는 시덴은 [[아준 전차|초기 불량이 남은 상태에서 양산되었고]] 개량형 시덴 카이의 생산량은 500기 미만에 불과하다.] 신형기의 개발 역량 면에서도 육군이 신규 채용한 공격기는 4식 중폭 [[Ki-67 히류]](600여기 생산)에 그치고 반대로 1식전 [[Ki-43 하야부사]] 이후 거의 매년 신형 전투기를 개발해 채용했으며 말기에 등장한 5식전 [[Ki-100]]을 제외하면 하야부사, 라이덴과 동급의 요격기인 2식단전 [[Ki-44 쇼키]], 3식전 [[Ki-61 히엔]], 4식전 하야테가 모두 1천기 이상 양산된 반면 해군의 공격기는 원샷 라이터로 악명 높은 [[G4M]] 일식육공을 비롯해 개전 후 신규 개발된 모델도 [[B6N 텐잔]], [[D4Y 스이세이]], [[B7A 류세이]], P1Y 긴가 등 다양하며 생산량 면에서도 1식육공 2,200기, 스이세이, 텐잔, 긴가가 각 1천기 이상으로 전투기에 쓰기도 모자라는 고성능 엔진을 대전 후반기까지도 공격 전력에 상당량 할애했다. 실제로 해군이 전투기의 비중을 공격기/폭격기보다 우선한 것은 1945년 들어서의 일로, 44년 2월 [[제1함대(일본군)]]의 해대와 함께 뒤늦게 [[거함거포주의]]를 포기하는 것보다도 더 늦게까지 [[함대결전사상]]과 [[폭격기무적론]]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 실상이다. 숙련 파일럿의 소모 및 적군의 방공 역량 향상으로 효과적인 항공 공격(통상 공격/카미카제를 불문하고)이 불가능해졌음이 이미 43년 9월 검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개념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던 육군 역시 '''미국을 상대로는''' 방공전이나 항공 대치전을 효과적으로 해낼 수는 없었던 것이지만, 그런 육군보다도 항공전에 대한 개념이 후진적이었던 해군이 가지고 있는 얄량한 공격 전력으로는 결국 카미카제가 고작이었던 것. 그 카미카제조차도 주력 전투함으로 방비가 가장 튼튼한 정규 항공모함이 최우선 목표였고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의 해양 전략 사상을 [[수박 겉핥기]]로 흡수해 러일전쟁 이후 해체 순간까지도 통상 파괴는 뒷전으로 밀어두고 적 전투함 격파만 우선하는 함대결전 사상에 매달린 나머지 효율은 한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결과는 일본 해군에게 '''항공 전력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라는 신랄한 평가가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의 결론이다. 이런 짓이 주로 해군 주도로 이루어진데는, 현실적인 이유로 [[미드웨이 해전]],[[필리핀 해 해전]]으로 항모전력 거의 대부분이 날아간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일본 육군 항공대의 항공전력은 대부분 중국전선에 몰려있었고, 태평양 섬의 방위전력중 방공망은 해군 담당이었다. 애초에 일본 육군 항공대의 항공기는 항속거리가 긴 전투기가 많지 않았다. 반면 해군의 경우 애초에 항모의 존재 이유가 함재기의 원거리 투사이고, 본국에서 생산된 함재기를 전역까지 직송으로 실어간뒤 전선에 투입하는 것이 항모의 기본 운용인데, 미드웨이와 필리핀 해에서 항모전력 대부분을 날려먹으면서 원래 항모에 태워서 옮겨야할 함재기들을 남태평양 전역에 보내려면, 일본 해군 항공대는 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규슈→류큐 열도→대만→필리핀 뿐이었다. 그 항로를 가뜩이나 신뢰성 바닥인 전쟁 후반기 함재기를 타고 경험없는 파일럿이 직접 그 구간을 비행해야하니, 거기서 일어나는 비전투손실률만 전체 30%에 달했을 정도라고 한다. 원래대로면 함재기와 함께 항모도 더 생산해야 했지만 이미 바닥을 드러낸 자원과 항공기에만 몰빵한 도조의 생산전략, 이미 제해권,제공권 전부 뺏긴 상태에서 어려운 비행을 뚫고 함재기가 필리핀까지 와봐야, 미군 전력들 상대로 무장으론 생채기도 못낼 초짜 파일럿들이 그나마 유의미한 대미지를 상대에게 먹일수 있는 방법은 결국 스스로를 인간 유도미사일화 하여 처박는 수밖에 없다.[* 이런 대공미사일 난사 형태의 방공망 전략은 우리 바로 윗나라를 비롯해 수많은 전쟁에서 극단적 열세에서 수세라도 유지하려는 이유로 많이 행한다. 그걸 20세기에 사람을 실어 들이받는 형태로 제식화한 나라라는게 문제였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