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미카제 (문단 편집) == 기타 == * 카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지명되어서 출격했다고 다 죽은 건 아니라서 간혹 생환해 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시기를 놓쳤거나 기계 고장, 컨디션 불량, 기후 불량 등으로 출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간혹 목표를 못 찾아 그냥 돌아온 경우도 있었으나, 이미 이성을 날린 [[상부#s-1]]는 [[맨발의 겐]] 1권에서 나온 것처럼 이들을 갈군 뒤 '''재출격'''시켰다. 때문에 9번에 걸쳐 출격했으나 적을 찾지 못해 돌아온 특공대원이 있었다. '''[[이뭐병|결국 그는 끌려가서 총살]]'''당했다. 그는 와세다 대학 졸업생이라고... 이쯤 되면 자국민을 '''갈아마신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 위에 여러 번 서술되었듯이, 초등학교만 의무 교육이던 당시에, 대졸자라면 장차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크고 훌륭한 인재인데, 이런 인재를 아주 찰나의 생명연장을 위해 일회성 자살 공격에 몰아넣은 것이다. * 이에 관련된 도시전설에 가까운(?) <고추잠자리>라는 전후 반전동화도 있다. 한 카미카제 파일럿이 적을 향해 날아가다가 우연히 계기판 안에 자리잡은 벌레를 보고 생명의 귀중함을 깨달아 벌레와 함께 살기 위해 원래 적기까지 갈 정도로 넣은 얼마 안 되는 연료로 적기가 아닌 무인도로 향해 날아가 무인도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 특공대원으로 생환한 이들 중 유명한 사람으로는 니시무라 코우(탤런트), 내각 관방장관 겸 외무대신과 후생성 장관을 역임한 소노다, 항공자위대 교관 및 [[전일본공수]] 기장으로 반전단체 대표인 시다 등이 있으며 반사회적인 행동을 한 사람 중에는 <천하제일회>의 우치무라 켄이치, 특공대원으로 자신을 포장한 범죄자로는 <3억엔 보험금 살인사건>의 아라키 호미, 츠루타 코지 등이 있다. * 1944년 10월 12일 ~ 15일에 [[대만]] 앞바다에 미 제3함대가 나타나자 역시 카미카제 공격을 시행했고 제26항공전대 사령관 아리바 소장이 직접 카미카제 대원이 되어 전사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게 아래에 나오는 명언으로 유명한 [[대만 항공전]]이다. 그런데 이 전투 결과 일본은 '''카미카제 공격=격침'''으로 여겨버려 '항모 11척 격침, 8척 대파'라고 선전해 일본 국민들을 잠깐 환호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소식을 [[윌리엄 홀시]] 제독은 [[개소리 집어쳐|코웃음을 치며]] >'''"[[도쿄 로즈]][[Fail Blog|가 전멸했다고 하는 제3함대는 현재 해저에서 무사히 인양되어 적을 향해 급속 퇴각 중]]"''' 라는 유명한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실제로 미군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 * 기쿠스이 작전 등 카미카제 공격을 일선에서 총지휘했던 [[우가키 마토메]] 제독도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의 소식을 듣자 몇 명의 부하를 이끌고 카미카제 공격에 나섰고, 당연히 사망했다. 이 때문에 이 사람이 겉보기에는 카미카제를 입안하고 실행했던 '책임자' 중 '진짜로 최대한 책임을 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같이 보이겠지만, 사실은 부하 조종사에게 그 자살 폭격기를 조종하게 했고, 자기는 그 뒷좌석에 타서 자살 돌격하는 치사한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그 부하 조종사의 유가족은 물론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 등에게 '''"[[물귀신|정말 책임을 지고 싶었다면 혼자 가서 뒈질 것이지 왜 죄 없는 부하들을 끌고 갔냐]]?"'''면서 대차게 까였다. 이런 인간이 다른 인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낫다'''라는 말이 나올 수준이니 말 다했다. * 아무래도 폭탄이나 어뢰 자체로도 위험한데 거대한 항공기까지 딸려 오는 셈이다 보니, 오늘날 아무리 비효율적이네 발악이네 욕 해봐야 공격당하는 미군 함선 입장에서는 매우 위협적인 것이 사실이었다. 실제로 미군의 대공포로 성능이 출중한 40mm 보포스 대공기총이 유명하지만 항공기 자체를 박살내는 데에는 위력의 한계가 있다보니 대전기 말에는 카미카제 공격에 대비해 무려 76mm 대공포를 장착한 [[디모인급 중순양함]]이 건조되었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곧 끝나버렸기 때문에 정작 카미카제에 대항해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대신 미국 항모와 전함들이 도크에 올 때마다 달아서 써먹었다. 거기다가 이러한 노력은 기본적으로 개념이 '크고 성능 짱짱한[* =사이즈와 가격도 끝내주는] 대공포를 달아 카미카제를 시전하는 적 기체를 [[즉사기|한 방에 날려야지]]' 수준이어서 그러한 '크고 짱짱한' 대공포들을 달 체급도 안 되는 구축함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소용이 없었고[* 그래도 나름대로 구축함들도 도배는 했다. 주포를 떼고 그 자리에 대공포를 달아 방공 전담함으로 만든다든지, 주포를 고각으로 올려 [[VT신관]]을 사용한다든지([[3식탄]]처럼 주포로 쏘는 건 비슷해도 3식탄보다 훨씬 효율이 좋다) 등.] 이미 대전기 중에도 대공포만으로 만든 대공화망의 한계가 지상, 해상 가리지 않고 드러났으며, 무엇보다 2차대전 이후 이러한 함선들이 수상 전투함 세력의 주축이 되어버린 이상 [[미국]]은 [[RIM-2 테리어|새로운]] [[RIM-8 탈로스|함대공]] [[RIM-24 타터|방어체계]]를 준비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아래 '의의(?)' 소항목 참고 바람.] * '''조선인도 카미카제기에 태웠다고 한다'''. 귀촉도, 화사 등 1940년대 시인 중 한 명인 [[서정주]]는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필명으로 '매일신보'에 '오장 마쓰이 송가(松井五長 訟歌)'라는 시를 발표하여 [[레이테 만 해전]] 배경의 전시 선전을 하고 카미카제의 우월성을 찬양했다. [[김재규]]도 여기에 끌려갔다 살아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인식과 달리 조선인 카미카제 희생자는 그렇게 엄청난 숫자는 아닌데, 배운 게 많지 않은 조선인에게 전투기 조종술이라는 고급 교육을 가르친다는 것 자체를 매우 떨떠름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애초에 카미카제 때문에 인식이 나빠지긴 했지만, 파일럿 자체는 엘리트나 다름없기에 충원이 어렵고, 식민지, 거기에 [[한국 독립운동|틈만 나면 독립하려고 하는 곳에서]] 대량으로 징집했다간 항공기 끌고 탈출하거나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주제에 어설프게 몰았다가 망가뜨릴 게 뻔하기도 했다. 일본이 개막장 공업에 비해 비행기 자체는 비교적 좋은 편이였던 것도 문제였고, 결과적으로 조선인이 강제 징용되어 희생된 것은 오히려 [[자돌폭뢰|이 쪽]]이다. 카미카제로 전사가 확인된 조선인은 16명으로, 모두 육군항공대 출신이다. 특별조종견습사관 또는 소년비행병 출신으로 대부분 [[오키나와 전투]] 중 전사했으며, 영화 호타루의 주인공인 탁경현 소위(1식전 하야부사 탑승), 연희전문 출신의 김상필 소위(1식전 하야부사), 일본 육사 출신의 최정근 중위(99식 습격기 탑승)가 유명하고, 토류로 B-29로 육탄 공격 및 격추후 전사한 경성법률출신의 노용우 소위 등이 알려져 있다. *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는 카미카제 특공대원들을 훈련시킨 [[http://www.47news.jp/korean/politics_national/2015/03/109180.html|이와키 비행장]]이 있던 곳에 세워졌음이 밝혀졌다. 이와키 비행장 기념비가 방사능 오염수 탱크 옆에 세워져 있다고... --[[피폭|가서]] [[영정#s-2|사진 찍고]] [[죽음|싶어질 정도로]] [[다윈상|잘 어울린다]].-- *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카미카제의 희생양은 소련군의 소해정이던 kt-152이다. 시무슈 섬을 공격하는 소련군에게 8월 18일에 일본군 전투기 혹은 공격기가 카미카제를 하여 비행기와 정면 충돌한 소련군 소해정은 즉시 침몰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