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불 (문단 편집) === 영국-아프간 전쟁과 근대화 === 1839년, 영국군에 의해 30년 전 폐위되었던 두라니 조의 아미르 슈자 샤가 복위되었다. 그러나 외세의 주둔과 슈자 샤의 폭정에 여론은 반발하였다, 특히 영국군의 사기 진작을 목적으로 그 가족들을 데려오자 영구 주둔에 대한 불안감이 생겼다. 거기에 일부 병사들이 현지 여자들을 건드리자 분노가 증폭되었다. 1841년 11월 카불에선 대대적인 봉기가 일어났고, 영국인들은 보이는 대로 살해되었다. 이후 영국군이 대규모의 민간인들과 천천히 후퇴하는 와중에 무함마드 칸의 아들인 와지르 악바르 칸의 바라크자이 군대가 습격하였다. 패배한 영국군은 항복을 제안했으나 와지르 악바르 칸은 페르시아어 (다리어)로는 사격 중지를 외치고 영국 측이 모르는 파슈토어로는 몰살을 지시하였다. 1841년 1월, 아프간 인들과 가족이 된 여성과 어린이들을 제외한 수천여 영국-인도인들은 간다마크 고개에서 얼어죽거나 잔혹히 살해되었다. 다만 악바르 칸의 [[잘랄라바드]] 공격은 격퇴되었다. 한편 영국군이 철수한 후 발라 히사르 성채에 웅거하던 슈자 샤가 1842년 4월 사망하자 악바르 샤가 아미르가 되어 바라크자이 왕조를 복구하였다. 다만 4개월 후 간다마크 참사에 대한 복수로 영국군이 돌아와 재차 카불을 점령, 포로들을 돌려받았다. 다만 역시 일대를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영국군은 분풀이로 차르 차타 바자르와 발라 히사르 등 시가지를 약탈, 파괴하고 귀환하였다. 이후 1845년 악바르 샤가 요절하자 인도의 유배지에서 돌아온 도스트 무함마드 칸이 복위하였고, 1863년까지 통치하였다. 사후 그 아들들간의 내전을 거쳐 셰르 알리 칸이 즉위했는데, 그 역시 친러로 기울자 영국군은 1878년 말 영국군이 재침하여 카불을 점령하였다. 셰르 알리칸은 마자르 이 샤리프로 도주해 사망하였고, 후계자인 무함마드 야쿱 칸은 영국과 간다마크 조약을 맺어 외교권을 박탈당한 채 그 보호국이 되었다. 이에 카불에서 반영 소요가 일어나 재차 영국인들이 학살당했으나 결국 진압되었고, 야쿱 칸은 그 배후로 지목되어 폐위되었다. 1880년 헤라트 총독 아이유브 칸이 메이완드에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칸다하르를 포위하는 등 반격에 나섰으나 영국의 원군에 패하고 이란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영국은 압둘 라흐만 칸을 옹립, 간다마크 조약대로 아프가니스탄을 속국화한 후 발라 히사르를 파괴하고 귀환하였다. 그 후 압둘 라흐만 칸은 21년간 집권하며 내부 반란들을 철저히 진압하였다. 뒤를 이은 하비불라 칸은 18년간 재위하며 카불을 근대화시켰다. 1903년엔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근대식 고등학교가 설립되었고 전기, 전화, 우편 시스템도 도입되었다. 1차 대전기에 하비불라는 일종의 중립 외교를 추구했고, 1916년까지 오스만-독일 대표단이 카불에 머물기도 하였다.[* 이후로는 영국 측에 베르사유 조약 참석을 요구했으나, 참전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1919년 후자가 암살된 후 벌어진 계승 분쟁에서 아마눌라 칸이 숙부인 나스룰라 칸을 누르고 아미르가 되었다. 그는 카불의 이드가 사원에서 간다마크 조약의 구속 없이, 아프가니스탄의 자유를 선언하였다. 민주적인 개혁과 자유의 약속에도 내부 결속이 힘들자 아마눌라 칸은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듀런드 라인]]을 넘어 [[1차 세계대전]]과 [[암리차르]] 학살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던 영국령 인도를 침공한다. 이로써 발발한 3차 전쟁에서 아프간 군은 카이바르 산지에서 전선을 유지하며 나름 선전하였다. 카불은 이번엔 영국군에게 점령되지 않았다. 다만 1차 대전을 겪으며 성장한 영국 공군이 카불의 아미르 궁전에 폭격을 가하는 등 심리적인 충격을 주었다. 이후 아마눌라 칸은 다른 문제들이 쌓여있던 영국과 협상해 완전한 독립을 얻으며 전쟁을 정치적인 승리로 마무리지었다. 아마눌라 칸은 카불 서남쪽 교외에 [[베르사유]]를 모방한 궁전 도시 다룰라만를 지어 머물렀다. 아마눌라 칸 역시 근대화에 힘썼으나 1928년 11월 급격한 근대화에 불만을 품은 부족들이 하비불라 칼라카니를 중심으로 내전을 일으켰다. 1929년 1월 아마눌라 칸은 카불을 탈출하였고, 그의 동생 이나야툴라 칸이 항복하며 칼라카니가 카불을 장악하였다. 바라크자이 왕당파는 그 방계 (도스트 무함마드 칸의 동생인 페샤와르 총독 술탄 무함마드 칸의 후예)인 무사히반 가문의 무함마드 나디르 샤를 중심으로 뭉쳐 1929년 10월 카불을 점령하고 칼라카니를 처형하였다. 이후 정식으로 [[아프가니스탄 왕국]]이 성립되었고, 도로 건설과 카불 대학 (1932년) 및 4만 상비군 설립 등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1933년 그는 불만을 품은 [[하자라인]] 고등학생에게 암살당하였고, 19세 아들 [[모하마드 자히르 샤]]가 계승하였다. 40년간 이어진 치세에 카불과 아프가니스탄은 유례를 찾기 힘든 평화와 안정의 시기를 누렸다. 냉전 속에서도 소련, 영국, 독일 등 다양한 국가들의 투자로 근대화가 진척되었다. 그러나 1973년 그는 해외 순방 중 사촌 다우드 칸의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뭔가 낯익다-- 왕정은 폐지되고 공화정이 세워졌다. 다우드 칸은 자히르 샤의 중립 노선 대신 적극적인 반공주의 노선을 취하였고, 이로써 촉발된 이념 대립은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이어졌다. 소련, 탈레반, 미군의 공격을 받으며 카불은 한 세기에 걸친 근대화 노력이 무색하게 크게 파괴되고 말았다. 현재도 [[미국]]과 [[탈레반]]의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전쟁]]에서 탈레반이 승리를 거두고, 거기에다 [[카불 공항 테러|IS에 의한 테러]]도 일어나서 상황이영 좋지 않다. 소련의 침공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막장의 역사는 [[아프가니스탄/역사]] 문서를 참고. 만약 아프가니스탄의 정국과 치안이 안정되고 어느 정도 기능을 할 수 있었다면, 관광지로서의 잠재력이 상당히 풍부한 곳이다. 문명의 십자로라는 별호답게 시장이 발달해 있고 유서 깊은 볼거리들도 많기 때문. 하지만 탈레반이 점령한 지금으로선 그저 먼 미래에 일어날지 말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고 말았다. 결국 탈레반이 점령하면서 안 그래도 나빴던 경제는 더욱 추락하였고 인권, 치안 역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악명 높은 [[산 페드로 술라]], [[카라카스]]보다 훨씬 위험한 세계 최악의 치안을 자랑하는 곳이 되었으니 말 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