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시오페아(밴드) (문단 편집) === 1기(1979 ~ 1989) === 1979년 5월, 카시오페아는 밴드명과 동명의 앨범 [[CASIOPEA]]로 프로 신에 데뷔한다. 앨범은 기존 4인의 멤버에 데이비드 샌본(David Sanborn), 랜디 브레커(Randy Brecker), 마이클 브레커(Michael Brecker)와 같은 화려한 게스트 세션을 통해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었고, 그 연주 스타일을 잘 나타낸 '스릴, 스피드, 슈퍼 테크닉'이라는 슬로건 또한 붙게 된다. 또한 데뷔 앨범과 동시에 싱글로 발매한 I Love New York이 [[일본항공]]의 뉴욕 캠페인 광고 음악으로 사용되면서 활동의 중심인 도쿄 교외에 국한되었던 인지도와 인기가 전국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하고, 2번째 앨범인 [[Super Flight]] 또한 데뷔 앨범을 능가하는 성과를 보여주었지만 직후 음악적 방향성의 차이로 드러머 사사키 타카시가 탈퇴하게 된다. 1980년, 짐보 아키라가 탈퇴한 사사키 타카시의 빈 자리를 채우게 된다. 짐보 아키라는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사쿠라이 테츠오가 대학의 [[빅 밴드]] 그룹 게이오기주쿠대학 라이트 뮤직 소사이어티(慶應義塾大学ライトミュージックソサエティ)에서 베이시스트 대역을 맡으면서 만나게 된 드러머였다. 사쿠라이는 짐보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사사키 타카시의 탈퇴가 기정사실화된 카시오페아에 추천하였고, 사사키 타카시의 탈퇴 후 정식 멤버로 들어오게 된다. 당시 3학년이었던 짐보 아키라는 그 전까지 프로 경험이 전무했고, 장래에 프로가 될 생각도 없었지만 빅 밴드 활동과 별개로 미국의 드러머인 스티브 갯(Steve Gadd)과 [[하비 메이슨]](Harvey Mason)을 동경하여서 그들이 참여했던 퓨전 음악들을 자주 듣고 카피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비슷한 음악성을 지닌 카시오페아에 들어오는 것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짐보 아키라가 가입하고 바로 녹음된 3집 [[Thunder Live]]는 음악 잡지 ADLiB 등의 평론계에서 큰 호평을 받았고, 이 앨범을 하비 메이슨이 감명깊게 들으면서 카시오페아의 활동에 참여해 일부 앨범들의 프로듀싱과 조언을 해주어 이후 카시오페아의 작풍이 변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당시 소속 레이블인 알파 레코드가 해외 진출에 매우 의욕적이었기 때문에 알파 레코드를 대표하는 뮤지션 중 하나였던 카시오페아 또한 미국과 영국 시장을 겨냥한 앨범들을 1981년, 1982년에 발매하여 해외에 진출한다. 미국에서 알파 레코드는 현지 법인 알파 아메리카(Alfa America)를 설립하고 카시오페아는 앨범 [[Eyes of the Mind]]와 [[Make Up City]][* 일본에서는 먼저 발매하였으나 미국에서는 Eyes of the Mind 이후 발매]를 발매하며 시장에 진출하였다. 두 앨범 모두 차트에 오를 정도의 성과를 보이며 단기적인 성공을 하긴 했지만, 이듬해인 1982년에 알파 아메리카가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미국 시장에서 철수하게 되어 계속 음반 발매를 할 수 없었고, 카시오페아의 미국 진출도 자연히 중단되었다. 미국 진출과 별개로 1982년 미국 뮤지션인 기타리스트 [[리 릿나워]](Lee Ritenour)의 일본 투어 중 리 릿나워 그룹과 협연하여 [[FOUR BY FOUR]]를 발매하기도 했다. 미국과 달리 유럽 시장에서는 꽤나 괄목할만한 성과들이 있었다. 1983년 첫 해외 공연을 런던에서 성공적으로 마쳤고, 1984년에는 일본 그룹으로서는 드물게 [[https://youtu.be/KgcD31Txlr0|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주목을 받는가 하면, 이후 2번째로 진행한 런던 공연은 [[NHK]]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독일, 스웨덴, 덴마크 등에서 공연하며 활발하게 유럽 투어를 진행하였다. || [youtube(_p56GJzyUaA)] || [youtube(Ut1eSinXMoc)] || || 1983년 런던 라이브 || 1984년 NHK 뉴스 보도 || 이후 1986년, 카시오페아는 유럽과 동남아 등지에서의 성공을 토대로 앨범 [[Sun Sun]]을 통해 다시 미국 시장 진출을 시도한다. 이 앨범은 [[데이비드 보위]]의 서포트 기타리스트로 유명한 카를로스 알로마(Carlos Alomar)가 프로듀서로 참여해 좀 더 팝 음악의 영향을 받아 음악성의 변화를 꾀했으나 미국 시장에서의 성과도 시원찮았고, 일본 국내 시장에서는 전작 [[Halle]]의 후광을 업어 골드 디스크(음반 10만장 이상 출하)를 달성하긴 했지만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 이후 카시오페아는 오랜 세월 함께해온 알파 레코드에서 폴리도르 레코드(Polydor Records)로 이적하고, 자신들만의 레이블 AURA를 통해 1987년 Sun Sun의 음악성을 어느정도 계승한 앨범 [[Platinum(카시오페아)|Platinum]]을 발매한다. 이후 1988년에는 '옛날의 곡과 닮아도 괜찮으니 격의 없는 자연스러움'을 목표로 [[Euphony]]를 제작하고, 1기 카시오페아의 마지막 앨범이자 라이브 앨범인 [[World Live '88]]을 발매한다. 한편 1988년까지 카시오페아는 매년 2장의 음반을 꾸준히 발매하면서도 일본 국내와 해외 모두에서 연간 100번이 넘는 라이브를 해냈다. 항상 카시오페아는 그룹으로서 활동을 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멤버들의 솔로 활동이 적었고, 다른 아티스트의 라이브나 레코딩에 참가하는 일도 드물었다. 1989년, 카시오페아는 폴리도르 레코드와의 계약이 끝나고 다음 소속사로 이적을 준비하는 동안 잠시 밴드 활동을 휴지하고 각 멤버들의 솔로 활동으로 그 공백을 메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쿠라이와 짐보 아키라가 따로 멤버를 모아 결성한 보컬 밴드 샴바라(Shambara)의 처우를 둘러싸고 노로·무카이야와 사쿠라이·짐보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 노로·무카이야는 샴바라의 향후 지속적인 활동이 카시오페아 활동 재개에 지장을 줄 수 있기에 활동 중지를 주장했고, 사쿠라이·짐보는 두 활동 모두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주장은 끝까지 모아지지 않았고, 결국 사쿠라이 테츠오와 짐보 아키라는 그 해에 카시오페아를 탈퇴하고, 이듬해에 짐사쿠(JIMSAKU)를 결성한다. 한편 멤버 분열 문제 외에도 소속사 이적 문제도 아직 남아있는 상황이었기에 카시오페아에게 1989년은 굉장히 쓰라린 해로 남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