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이펑시 (문단 편집) == 역사 == 카이펑, 즉 개봉(開封)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춘추시대]] 이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정장공|정(鄭)나라의 장공(莊公)]]이 현재의 카이펑 근처에 성을 쌓고 계봉(啓封)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에서 시작한다. [[전국시대(중국)|전국시대]] 때는 기원전 364년부터 [[위(전국시대)|위]]의 수도였고, 당시 이름은 대량(大梁)이었다.[* 원래 수도는 [[윈청|안읍]](安邑)이었으나 위혜왕대 [[진(영성)|진]]과의 전쟁에서 밀려 방위가 위태로워지자 천도했다. 안읍 일대는 진에 완전히 넘어간 이후 하동군이 설치된다.] [[황허]] 유역에 평야였기 때문에 시내에 많은 [[운하]]를 파서 교통과 물류의 중심이 되었는데, 반대로 이 때문에 [[홍수]]와 외부침략, 특히 [[수공]]에 매우 약했고, 결국 진의 수공에 함락되어 위는 멸망한다. 이때 대량의 완강한 저항에 노한 [[진시황]]의 명령에 따라 철저히 파괴되어 이후 [[한나라|한]], [[위진남북조시대]]의 수백 년 역사에 이렇다할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래서 중국의 주요 고대 도시 중 [[삼국지]]에 중요하게 나오지 않는 거의 유일한 도시다.] 후한-삼국시대에는 연주 진류(陳留)군[* [[헌제]]가 황제 즉위 이전 책봉받은 작호인 진류왕의 진류.]에 속했고, 현 중심지는 준의(浚儀)현에 속했다. [[파일:external/1802.img.pp.sohu.com.cn/c33989721_1384553311fg213.jpg]] [[수나라]]가 만든 [[대운하]]를 [[당나라]] 때 적극 사용하면서 개봉은 번창하였다. 대운하 덕분에 수운이 발달해 상업도시로 성장했는데, 당시 지명은 변(汴)이었다. 당 멸망 이후 [[5대10국시대]]의 5대,[* [[후당]] 제외. 후당의 수도는 [[낙양]]이었다.] 이를 통일한 [[북송]]은 변을 수도로 삼았다. 북송 시기 공식 명칭은 동경개봉부[* 서울특별시에 비유하면 동경은 특별시, 개봉부는 서울.]였고 변은 변경(汴京)[* 사극에서 자주 쓰인다.], 변량 등의 명칭이 되어 민간에서 자주 쓰였다.[* 조선시대 한성부를 한양이라고도 부르던 것과 같다.][* 다만 이는 그저 통속적으로 자주 쓰이던 것이지 개봉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쓰였다고 보긴 어렵다.] 북송의 엄청난 경제력으로 매우 번화했고, 야간통행금지와 상업 구역 제한이 철폐되어 [[불야성]]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으며, 상업도시답게 여러 가지 사건이 많았기 때문에 [[포청천]] 전설이 나올 수 있었다. 장택단의 그림 청명상하도와 맹원로의 저서 동경몽화록에 이때의 번영이 묘사된다.[[https://pgr21.com/humor/365253?|#]] 가장 번영했던 11세기의 인구는 40만에서 100만 정도로 추정되고,[* 일단 송나라의 역사를 다루는 사서 《[[송사]]》 85권 지리지1에 적힌 1100년대의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1100년대 시점으로 개봉부 전체를 다루는 행정구역 [[경기로]]의 인구가 442,940명이었다. 다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추정치의 편차가 크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코르도바(스페인)|코르도바]],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와 함께 당대 최대의 도시로 꼽힌다.] 북방 민족의 공격에 대비해 삼중벽을 쌓았다. 다만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은 그대로여서 1127년 [[금나라|금]]의 공격으로 함락, 황제가 포로로 잡혀가는 [[정강의 변]]이 일어나 금의 영역이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금의 수도 [[베이징|중도]](中都)의 뒤를 이은 제 2도시였고 남송과 몽골이 침략하여 위기를 맞자 [[선종(금)|선종]]이 수도로 삼기도 했지만 결국 [[애종(금)|애종]] 때 몽골군의 포위로 인한 아사, 전염병 유행으로 백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고, 금나라가 무너지고 [[남송]]이 옛 수도를 되찾는가 싶더니 다시 [[몽골 제국]]에 함락되어 철저히 파괴되었다. [[명나라]] 때 재건되는가 싶더니 [[이자성의 난]] 때 명군의 수공으로 다시 깡촌이 된다. [[청나라|청]]대 [[강희제]]가 재건을 명했지만 과도한 개발, 기후 변화와[* 이 때문에 현재 화북의 대부분 도시들이 다 침체기다. 사실 화북의 침체는 중국 내에서도 꽤나 오랜 골칫거리로 남송과 명나라를 거치며 경제와 상업의 중심이 화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했고 무엇보다 화북지역이 원나라 이후로는 명말청초의 대혼란과 신해혁명, 중일전쟁, 국공내전을 거치며 쑥대밭이 되어버리면서 현대에 와서는 원동력을 거의 잃어버린 상황이다. 일례로 중국의 수도는 베이징이지만 인구나 경제력 면에서 베이징보다 상하이나 항저우가 아득히 앞선다.] 그로 인한 잦은 홍수로 더이상 발전하기 힘들었고, [[중일전쟁]] 때도 [[1938년 황허 홍수|수공을 맞아]] 현재까지 과거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2015년 기준 1인당 GDP 5672달러로 허난에서도 가난한 편이다.] 그나마 1954년까지는 [[허난성]]의 성도 지위는 계속 유지하고 있었는데, 성정부도 1954년에 철도 요충지인 [[정저우시]]로 옮겨갔다.[* 청 말기까지는 허난성의 중심 도시였지만, 1906년 개통된 징한철도(오늘날 [[징광철도]]의 [[우한]] 이북 구간)가 이 도시를 비껴가 정저우시를 지나는 바람에 카이펑시는 발전이 지체된 반면 정저우시는 철도의 수혜를 입어 카이펑시보다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카이펑보다 개발이 덜 된 정저우를 경유하는 것이 공사비가 덜 들고 노선 길이가 단축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 이 영향으로 허난성 정부가 정저우시로 옮겨가게 되었다. 참고로 [[대만/영유권 주장 지역|중화민국의 명목상 행정구역]]에서는 성정부 이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카이펑시가 허난성의 성도로 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최근에 이 도시가 언급된 일로는 [[문화대혁명]] 당시 국가주석이었던 [[류사오치]]가 [[마오쩌둥]]에 의해 숙청당해 귀양왔다가 [[홍위병]] 의사의 치료 거부로 1969년에 사망한 사건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