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쿠레키리시탄 (문단 편집) == 발생: [[일본]]의 [[기독교]] 박해 == [[일본]]에 처음 전파된 기독교 종파는 [[가톨릭]]인데, [[센고쿠 시대]] 무렵 [[일본]]과 [[무역]]을 하던 [[스페인]],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 전래되었다.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들은 [[서양]] 세력과의 [[무역]]으로 이득을 챙기기 위해 가톨릭 전래를 허가하였고, [[오토모 소린]]이나 [[타카야마 우콘]], [[이치죠 카네사다]],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구로다 조스이]] 등 스스로 가톨릭 신자가 된 다이묘도 있었다. 이 때 개종한 사람들을 일본에선 '키리시탄', 개종한 다이묘를 '키리시탄 다이묘'라 불렸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은 후, 히데요시는 각지의 [[다이묘]]들이 [[서양]]과 [[무역]]으로 이득을 얻어 세력을 키워 자신에게 대항하게 될까 우려하여[* 오토모 소린은 서양 선교사의 연줄을 통해 서양으로부터 [[불랑기포]]를 들여왔고, [[1586년]] 우스키 성(臼杵城) 농성 당시 [[시마즈 이에히사]]의 군을 상대로 큰 위력을 발휘했다. 심지어 소린은 '''불랑기포의 자체제작기술도 보유'''했던 듯하다. 다만 불랑기포는 일본 내에서 별로 반응이 좋지 않았는데, [[오토모 소린]] 항목 참조.] 그 첨병인 선교사를 겨냥해 [[https://ja.wikipedia.org/wiki/%E3%83%90%E3%83%86%E3%83%AC%E3%83%B3%E8%BF%BD%E6%94%BE%E4%BB%A4|바테렌(선교사) 추방령]][* 바테렌(伴天連)은 [[포르투갈어]] 파드레(padre)의 고어(古語)로, 가톨릭이 일본에 전래된 당시의 선교사나 신부에 대한 호칭이었다(출처: <동아시아 역사와 일본>)]을 내리고 1597년에 나가사키에서 [[일본 26위 성인|키리시탄을 집단 처형했다.]] 그리고 일부 [[광신도]]들이 [[신토]]와 [[불교]]는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신사(신토)|신사]]와 [[절(불교)|절]]을 습격해서 신체를 훼손하고 [[불상]]을 파괴하는 등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한 뒤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치세에 금교령(禁敎令)을 내리고, 가톨릭 선교사들을 추방하거나 처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후 외국과 [[번]]이 독자적으로 무역하는 것을 막고 [[쇄국정책]]을 유지했다. 각 번들에서도 다이묘의 성향에 따라 박해가 일어나기도 했다. [[파일:external/www.pine-o.co.jp/rakujo2.jpg]] 반군의 근거지였던 하라성(原城)을 공격하는 막부군. [[일본]]에서 [[가톨릭]]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계기는 키리시탄들을 중심으로 막부의 지배에 저항하여 대봉기를 일으켰던 [[시마바라의 난]]이다. 시마바라의 난을 겪은 뒤 에도 막부는 '키리시탄은 정권을 엎으려는 반란분자'라고 생각했으므로 [[후미에]] 같은 일을 벌여 키리시탄을 색출해서 죽이려 하는 등 철저한 박해를 가했다. 이러한 금교령은 에도 막부의 통치기간 내내 유지되었다. 이렇게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키리시탄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지만, 키리시탄임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면 생명이 위험했기 때문에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그렇게 '''장장 250년 ''' 동안 숨어서 [[신앙]]생활을 했다. 이렇게 본인들은 숨는다고 숨었지만, 실은 [[에도 막부]] 역시 카쿠레키리시탄의 존재를 다 파악하고 있었다(…). 법대로 하자면 다 처형해야 하지만, 일본의 천주교도들은 정부에 '''무력 저항'''을 한 역사가 있으므로 한두 명이 아니라 수천 명 단위 단체가 발각되어 처형하면 '''제2의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그냥 사상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생각이 다른 자.]이라는 빠져나갈 수 있는 이름으로 부르며 눈감아줬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도 이노우에 지쿠고노카미가 [[후미에]]를 마친 로드리고에게 "아직 고토 열도 쪽에 숨어서 자기들끼리 믿는 키리시탄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잡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뿌리가 잘린 거나 다름없으니 서서히 말라 죽을 테고''', 애초부터 [[일본]]과는 맞지 않았던 기독교라는 서양의 묘목은 이 늪지와 같은 땅에서 본래의 모습을 잃고 변질되어 버릴 테니까." 하고 이죽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1800년대 초반이 되면 카쿠레키리시탄들이 다시 발각되는데, 키리시탄이 아닌 다른 이상한 종교로 간주하여 묵인하거나 배교만 시키고 풀어줬다. 시마바라의 난이 이미 터졌었던 [[아마쿠사]]에서 2백 년 만에 [[https://ja.wikipedia.org/wiki/%E5%A4%A9%E8%8D%89%E5%B4%A9%E3%82%8C|1805년에 '''또 대량으로''' 신자가 발각되었는데]] 막부에서는 이들에게 강제로 후미에 및 배교 서약서를 쓰게 하고 사건을 덮어버렸다. 사실 이 키리시탄들이 발각된 이유는 육식 금지령을 어기고 [[소고기]]를 먹었다가 들킨 것 때문이다. [[하이쿠]] 시인인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 가운데 君が代や茂りの下の耶蘇仏(천황 치세여, 우거진 수풀 아래 기독교 불상)이라는 시가 전하는데, 잇사가 [[규슈]]를 여행하던 중에 가톨릭 [[성상(조형물)|성상]]을 보고 읊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