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쿠레키리시탄 (문단 편집) == 발견 == [[파일:external/oratio.jp/ooura-720x480.jpg|width=200%]]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 개항 이후 외국인에 한해 신앙 활동이 허가되었고, [[나가사키시|나가사키]]에 새로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 당시에는 '후란스데라(仏蘭西寺)', 즉 [[프랑스]] [[절(불교)|절]]이라고 불렸다. 과거 전국시대~에도시대와 달리 19세기 일본에서의 가톨릭 포교는 동시기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프랑스인]] [[신부(성직자)|신부]]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 곳은 일본 26위 성인 성당으로 불린다.]의 베르나르타데 프티장(Bernard-Thadée Petitjean.1829~1884) 주임신부는 일부러 [[성가]]를 부르며 다니는 등 [[선교]]를 시도했으나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성당에 구경왔던 사람들 가운데 카쿠레키리시탄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이 성모상을 보게 되면서 그들이 모여살던 마을에 '''"프랑스 절에 [[성모 마리아]]님이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쿠레키리시탄들 사이에는 당시로부터 250여 년 전 [[순교]]한 바스챤[* 세바스티아노라는 [[세례명]]을 받은 사람으로, 평신도 지도자였다고 전한다.]이 예언한 "7대가 지나면 흑선을 타고 파파([[교황]])가 보낸 콘페소르(고해신부)가 온다. 매주라도 콘삐산([[고해성사]])을 할 수 있다. 어디서라도 큰소리로 키리시탄의 노래를 부르며 걸을 수 있는 시대가 온다. 길에서 젠쵸(외교인)를 만나면 그가 길을 양보한다."라는 전승이 있었다. 이에 예언이 실현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1865년]] 3월 17일 [[금요일]], [[산파]] 이사벨라 유리의 가족과 동네 사람 13~15명(모두 카쿠레키리시탄)이 구경을 핑계 삼아 오더니, 기도하고 있던 프티 장 신부에게 '''"성모님을 공경하십니까?", "결혼은 하셨습니까?", "[[전례력]]을 지키십니까?"'''[* 이는 처음 [[가톨릭]]이 일본에 전해질 때가, [[유럽]]에서 한창 가톨릭과 [[개신교]]가 치고 박고 할 시기였기 때문. 그래서 이 3가지는 둘을 구별하는 단서로 카쿠레키리시탄 사이에 구전되었다. 그렇기에 카쿠레키리시탄들은 [[메이지 시대]]에 가톨릭과 함께 들어온 개신교에는 가지 않았다.]를 질문하였다. 이에 프티장 신부는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제는 결혼하지 않으며, 전례력을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정확하게 이사벨라 유리는 "지금 저희는 슬픈 시간([[사순 시기]])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도 지킵니까?"라고 질문했다.] 키리시탄들은 그제서야 "우리의 마음도 신부님과 같습니다."라고 속삭인 후 "サンタマリアの御像はどこ? (성모 마리아님의 성상은 어디 계시나요?)"라고 물었다. 이에 프티장 신부가 안내해 주자, 그냥 구경 온 척하던 '''마을 사람 전원이''' 갑자기 몰려들어 기도를 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온 이들이 가톨릭 사제라고 확신하여 감추어 온 신앙을 드러낸 것이다. ||[[파일:오우라 천주당의 '신자의 재발견'.jpg|width=200%]]|| ||오우라 천주당에 새겨진 '신자 발견'을 그린 조각|| 1865년 [[3월 17일]]의 이 사건은 교회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로, '신자 발견'이라고 부른다. 프티장 신부는 이를 당시 [[요코하마]] 교구장 [[주교]]에게 보고하였다. [[일본]] 외부에서는 이런 신자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이들을 발견한 서양 신부들은 이를 '''[[기적]]'''이라고까지 말했다. [[도쿠가와 막부]]를 계승한 메이지 정부 또한 키리시탄 박해를 철폐하지 않아서, 이들을 굴비 엮듯 엮어서 좁은 방 안에 가두고 죽지 않을 만큼만 물과 음식을 주었다. 대놓고 [[고문]]을 하지는 않았으나, 좁은 곳에 많은 사람을 집어넣어 미어터지는 방 안에서 더위와 질병에 시달리게 하거나 추운 곳에 유배 보내 눈 오는 바깥에 방치하는 식으로 가혹한 탄압을 가하는 과정에서 여러 [[순교자]]가 나왔다. 이 일로 당시 일본과 통상 중이던 서구 열강들이[* [[미국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 [[영국 국왕]] [[빅토리아 여왕|빅토리아]],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 등.] '''기독교 신자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불평등 조약 개정도 없다'''며 메이지 신정부를 압박했다. 이때 일본은 [[외교]] 채널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는다. 그 자들은 기독교인이라서 박해받는 게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그들이 종교를 버린다면 풀어줄 것이다."라고 말해[* 그러니까 “종교 문제 때문인 건 맞는데 쟤들 기독교 아님. 어쨌든 아님.”이라고.] 실질적으로 키리시탄 박해였음을 에둘러 시인했다. 메이지 정부 내 [[존황양이]]파 인사 가운데는 "우리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저네들이 과연 [[불평등조약]] 개정해 주겠어? 이건 그냥 우리에 대한 기 죽이기고 [[내정간섭]]이잖아!"라며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고, 워낙 박해해온 세월이 길고 집요했다 보니 민중들 사이에서도 [[사교]](邪敎)로 각인되어 "키리시탄 박해 해금? 그거 꼭 해야 되나? 위험한 거 아냐?" 정도로 거부감이 적지 않았다. 한편 오랫동안 일본 민중들 사이에 신앙해오던 불교에 대한 강제적인 폐불훼석이나 국가신토를 따르지 않는 각지 신사에 대한 강제 통폐합 과정에서 불교계나 기존 신토계의 반발에 직면했던 메이지 정부가 마침 '[[공공의 적]]' 취급 받던 키리시탄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이용해서 그들의 반발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서양]]과의 교류를 희망하던 메이지 정부에게 있어 종교의 자유를 허하라는 서구 열강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기독교 신자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불평등 조약 개정 안 해준다'''고 나오니…[* 이는 서구 열강이 죄다 [[기독교]] 신자가 인구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당장 카쿠레키리시탄 발견 이후에 [[청나라]]에서 발생한 [[의화단의 난]]도 단순히 외세에 저항하는 운동이 아니라 [[중국]] 내 기독교 신자에 대한 대대적인 [[제노사이드]]로 이어지자, 열강 국가들 내부의 여론이 대폭발하면서 열강들이 대규모의 군대를 파병해 개입하는 것으로 일이 커졌다. 현대에도 이런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ISIL]]가 자신들의 점령지에서 납치된 현지의 토착 기독교인들을 학살하고 개종을 강요하자, 이에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IS를 응징하자는 여론이 나오면서 직접 [[중동]] 지역으로 들어가서 의용군을 결성해 맞서싸우기도 했다. 아무리 [[정교분리]]가 잘 되어있는 국가라도 종교단체 자체가 종교에 관해서는 하나로 뭉쳐있는 거대한 세력이다보니 정치인들이 이들의 말을 마냥 무시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결국 [[1873년]] [[2월 24일]] 키리시탄들이 풀려났고,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가 금교령을 폐지하고 [[대일본제국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면서 카쿠레키리시탄은 대부분은 통상적인 형태의 가톨릭으로 원복하였다. 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지라 카쿠레키리시탄의 전승이 많이 변해서 "조상님의 종교는 그렇지 않다!"라며 자신이 믿는 종교의 원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가톨릭으로의 원복을 거부하고 카쿠레키리시탄으로 남는다. 이런 자들을 하나레키리시탄(離れ切支丹, 떨어져 나간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다만 하나레키리시탄은 일본 내에서도 거의 [[천연기념물]]급이다. 대다수의 카쿠레키리시탄들은 다시 원복했기 때문.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카쿠레키리시탄들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카쿠레키리시탄들은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라틴어]] 기도문도 역시 입에서 입으로 전수하여 공동체의 원로가 세례를 베푸는 식으로 전승하였다. 그런데 구전하는 동안 라틴어 기도문의 발음이 바뀌었으니, 도대체 어디까지를 천주교 기준으로 유효한 세례라고 인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세례성사]]는 받는 이가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일 의지가 있고 다른 이가 물을 이마에 부으며 "나는 [[삼위일체론|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사람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말하는 '형상'만 충족된다면 '''무조건''' 유효하다. 이들이 보존한 라틴어 기도문을 읽은 것이 '그렇게 말한 형상'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세례가 무효화되는 것은 딱히 예민한 문제가 아니었다. 만일 이들의 세례가 무효하다면 제대로 된 형태로 다시 치러주면 그만이기 때문. 하지만 이들의 세례가 교회법적으로 유효한 세례라면 또 세례를 해주는 것이 되므로 민감했던 것. 가톨릭이든 정교회든 개신교든 세례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성사[*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고 박해도 심하던 곳에선 간혹 갓난아기가 세례를 2번 받는 사고(…)가 빚어지긴 했다. 하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한 번만 해줄 수 있었다.]이고, 세례를 여러 번 하는 것은 [[재세례파]]를 긍정하는 꼴이 될 수 있으므로… 프랑스 성직자들은 세례 기도문을 확인하여, 라틴어 발음이 정말 심각하게 변형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가급적 카쿠레키리시탄들이 받은 세례를 인정하기로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