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카쿠레키리시탄 (문단 편집) == 기존 가톨릭과 다른 점 == 이를 문화 연구의 관점에서 보자면 상당히 흥미롭다. '원형 문화'와 '오랜 세월 동안 구전만으로 이어지면서 뒤바뀐 변형 문화'를 눈앞에서 확실하게 비교 대조해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사례로서, '''원형 문화와 변형 문화가 모두 확고하게 존재한다.''' [[가톨릭]]은 단일성을 유지한 채로 현재까지 굳건하게 살아 있으며, 원조 가톨릭의 입장에선 카쿠레키리시탄이 변형된 집단이지만 원조와 연락이 끊긴 채로 이어진 카쿠레키리시탄(특히 하나레키리시탄)의 입장에선 원조 가톨릭과 다른 점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막부의 박해 때문에 외국인 [[성직자]]들은 순교하거나 [[배교]][* 배교한 성직자 중에선 크리스트발 페레이라(포르투갈)과 주세페 키아라(이탈리아, 당시는 통일 국가는 아니었다)가 있다. 두 사람은 배교 후 일본식 이름을 받고 기독교 물품을 검열하는 자리를 받았다. 이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나온 소설이 바로 <[[침묵(소설)|침묵]]>.]하며 [[전멸]]해 버렸고, 외국 선교사에게 교육받아 [[일본인]] 성직자들이 탄생하기도 했지만 일본 기독교는 아직 스스로 [[성직자]]를 양성해낼 정도로 성숙한 단계는 아니었고 이들 역시 박해 때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 싹 몰살당하고 말았다. 시마바라의 난의 지도자인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도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평신도였다. 게다가 [[포르투갈]]과의 무역이 완전히 단절되고,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와는 선교불허를 조건으로 제한된 [[무역]]만을 유지했기 때문에, 카쿠레키리시탄들은 자신들을 지도해줄 성직자를 모셔오기는커녕 가톨릭의 본산인 [[교황청]]과도 일절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일본인 [[사제]]와 [[수도자]]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전술했듯 사제와 수도자를 직접 양성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스스로 양성해냈더라도, 어차피 교황청과 연락이 닿지 않으면 그들이 정식 사제였다고 보기도 힘들 것이다.) 다행히 초기 일본 가톨릭의 지도자들은 박해 때문에 완전히 성직자가 사라지고 평신도들만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몇 가지 교육자료를 남기고 신자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자료들은 향후 카쿠레키리시탄이 250년간 버티는 마지막 신앙적 보루가 되었다. 결국 숨어서 살아남은 신자들은 [[전례]]를 집전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이끌어줄 성직자가 없는 상태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의 상황은 본문에 있으며 개항 이전에 배출된 마지막 일본인 사제인 [[고니시 만쇼]]가 [[1644년]] 순교하면서 개항 때까지 성직자가 없었다. [[1709년]] 이탈리아 선교사 [[https://en.wikipedia.org/wiki/Giovanni_Battista_Sidotti|조반니 바티스타 시도티]]가 밀입국했지만 카쿠레키리시탄 공동체와 접촉하지 못하고 막부에 잡혀 1714년에 옥사했기에 개항 때까지 성직자가 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시도티 신부의 심문을 맡았던 막부의 관리 및 학자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시도티 신부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들은 서양 소식을 기록해 모은 서양기문(西洋奇聞)이라는 책에 있다. 아라이는 시도테 신부의 심문을 마치고 막부에 보고하기를 '그냥 본국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상책이고, 평생 가둬 두는 것이 중책이고, 처형시키는 것이 하책'이라고 했다. 시도티 신부는 자신이 연금되어 있던 기리시탄 저택의 하인 부부에게 기독교를 전도하다가 투옥되어 끝내 옥사했다.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는 당시 시도티 신부의 도일과 체포, 아라이 하쿠세키의 심문 과정부터 끝내 시도티가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내용을 다룬 단편소설 '[[지구의]](地球儀)'를 썼다. 이 소설은 그의 단편집 <만년>에 수록되어 있다.] 자기들끼리 기억하는 몇 안 되는 [[구전]] 전승만으로 [[종교]]를 유지해야 했다. 사소한 성물도 기리시탄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경]] 내용도 온전히 유지하지 못했다. 그들 자신은 크리스천으로 남고자 했지만 아무래도 구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250년이 지나는 동안 신자들의 신심과는 별개로 외형상으로는 상당히 다른 독특한 종교가 되어버렸다. ||<:>[youtube(-oS9wR67mDE)]|| ||<:>카쿠레키리시탄의 성가.|| 큰 특징으로는 쵸우가타(翁方)라는 원로격 우두머리의 아래로 비밀 조직을 유지하며 주문 등을 전파하는 [[밀교(불교)|밀교]]적인 특성을 지녔으며, 탄압을 피하기 위해 각종 상징물에 몰래 종교적인 뜻을 담았다. 특히 [[불교]]로 많이 위장하였으며, [[불상]]에 [[불경]]으로 위장하여 기독교적인 문구를 집어넣거나 [[거울#마경|마경]] 같은 것을 만들기도 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Virgin_Mary_disguised_as_Kanon_Japan.jpg|width=235]] [[파일: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의 마리아 관음 돌조각.jpg|width=250]] [[파일: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의 마리아 관음 도자기.jpg|width=250]] || ||<:>카쿠레키리시탄의 마리아 관음상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인데 위의 것들은 모두 '''[[성모 마리아]]상'''이다. 맨 앞의 [[불상]]을 자세히 보면 가슴에 [[십자가]] 무늬가 있는데 이런 성상은 성모상을 불상으로 위장했다고 하여 마리아 관음(マリア観音, 마리아 칸논)이라고 한다. 심지어 '삼존불' 형식 성상이 발견된 적도 있다. 당시 일본에서 원래 모양대로 성모상을 모셨다가는 "나는 키리시탄이오." 하고 자백하는 짓이라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있는 것들은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에는 있는 마리아 관음인데, 본디 [[불교]]에는 송자관음(送子觀音)이라 해서 아이를 안은 관음상이 있기에 자기네 신앙을 숨기기에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사실 이것은 [[가톨릭]]의 시각으로 보아도 딱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모상이 [[현지화]]되는 것은 전 세계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양상이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에 설치된 [[제대]] 옆에도 [[한복]]을 입은 성모상이 모셔졌다. 카쿠레키리시탄들이 탄생하기 거의 천 년 전에 아시아에 와서 기독교를 전래한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에서는 '마리아 관음상'뿐만 아니라 '마리아 관음도'나 '예수 미륵도' 등 불화를 기반으로 한 '[[이콘|성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들이 외우던 기도문을 오라쇼([[라틴어]]: oratio)라고 하는데, 당시까지 전래되었던 [[라틴어]] 기도문을 음차하여 염불처럼 음률을 붙인 형태를 띠고 있다. 당연히 뜻은 제대로 모르고 그냥 소리나는 대로 외웠는데, 예를 들어 [[미사|성찬례]](미사)를 의미하는 'Eucharistia(에우카리스티아)'는 구전되면서 '요우카시치'로 바뀌고, 다시 '요우가노시치'가 되었다가 '요우가시치야'로 바뀌더니 [[한자]] 훈차 표기로 八日の七夜[* 요우카노시치야, 요우카=八日, 시치야=七夜]가 되어 본래의 의미를 짐작할 수 없게 되었다. 오라쇼는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현재는 [[일본]]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성호경]]을 예로 들면 >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 Amen. >인 노미네 빠뜨리스, 엣 필리이, 엣 스삐리뚜스 상띠, [[아멘]]. >[[성부]]와 [[예수|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을 >いん なうみね ぱあちりす ゑつ ひいりい ゑつ すぴりつす さんち あめん >인 노-미네 파-치리스 엣 히-리- 엣 스피리츠스 산치 아멘.[* 역사적 표기법이기 때문에 なう는 '나우'가 아닌 '노:'로 읽으며, 어중, 어미에 오는 つ는 일반적으로는 '츠'로 읽지만 [[촉음]]이 될 수도 있다.] 으로 외우는 식이다.[* 이 외에도 많은 버전이 있다. [[https://www.google.co.kr/url?sa=t&source=web&rct=j&url=http://www.kjkin2000.com/Artboard/Library/fileDown.asp%3FstrBoardID%3Dnonpds%26intNum%3D1002%26intSeq%3D168&ved=0ahUKEwiB8pS4tv7PAhUHiLwKHbtlDUoQFggqMAc&usg=AFQjCNETxrkZJxkf_gRKr5Dk4KhypI9uKw&sig2=tFV4O4bNc_phHOqyE_oyjQ|이 논문]]의 16쪽 참고. 논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어 특유의 발음으로 라틴어 기도문을 표기하고 외웠던 것 뿐만 아니라 완전 다른 기도문인데 성호경인 경우가 꽤 있다.] 이들이 가톨릭으로 복귀한 직후인 1873년의 교리지도서 '세례성사'에서는 성호경을 다음과 같이 표기했다. >いん のみね ぱちりす えつ ひりい えつ すぴりとす さんち あめん >인 노미네 파치리스 엣 히리- 엣 스피리토스 산치 아멘. 일본어 음가 표기의 한계를 제외하면 다시 라틴어에 가까워진 것을 볼 수 있다. [[라틴어]]가 [[로망스어]]로 [[스트라스부르 서약|변해가는 모습]]과도 유사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성경의 내용은 두루뭉술하게 옛날 이야기처럼 구전되었다. 전승도 달라졌는데, 선악의 이분법적인 [[서양]]의 세계관과 달리 융합과 용서를 중심으로 하는 [[동양]]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아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내쫓긴 사건이 사라졌고, 이에 따라 '''[[기독교]]의 중심 교리인 [[원죄]]가 사라져버렸다.''' [[야훼|하느님]]에게 용서를 받은 것으로 되었다고 변개되었다.([[http://dylanzhai.egloos.com/3384808|참조]]) 또한 카쿠레키리시탄들은 자신들의 신앙대상을 [[데우스]] 사마(님)라고 불렀다. 소토메, 고토 등 나가사키계 키리시탄의 전승 [[서적]]인 '''천지시지사(天地始之事)'''[* 키리시탄의 교리와 그 존재 의의, 신앙을 지켜야 할 이유를 적은 책]에는 기본적인 성서의 내용도 있지만, 아담의 자녀인 치코로우(ちころう)와 탄호우(たんほう)는 [[근친혼|남매인데 결혼하여 자녀를 보았다]]고 하는 등[* 원래 [[성경]]에 언급된 아담의 자녀는 그 유명한 [[아벨]]·[[카인]]·[[셋(창세기)|셋]] 뿐이다.], 일본 전통의 [[이자나기]], [[이자나미]] 설화가 혼합된 모습도 보인다. 카쿠레키리시탄이 문화적 가치가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장 보수적이며 굳건해보이는 문화인 종교 문화조차도 철저한 탄압 아래에서는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뒤틀리기 마련이고 탄압 하의 일본 가톨릭 역시 원형에서 상당히 벗어나 변형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심을 유지하려는[* 제대로 된 성직자 없이 오랜시간을 보내오면서 형태는 달라졌어도, 사상이 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 인간 의지의 경탄스러움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전수된 문화가 원류와 접촉이 끊긴 후 어떻게 토착화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료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