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프 (문단 편집) === 내용 형식 논쟁 === 김기진이 박영희의 <철야>와 <지옥순례>를 비평한 글, <문예월평>을 두고 박영희가 반박하면서 시작되었다. 1926년 12월 <조선지광>으로부터 1927년 2월 <조선문단>까지의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논쟁이었으나 이후 조선프로예맹의 방향을 설정했다는 점과 처음으로 비평이 문학사에서 중심적인 위치로 올라섰다는 점에서 중요한 논쟁으로 평가된다. 논쟁의 발단은 팔봉이 회월의 단편소설 「철야」와 「지옥순례」를 놓고서 비판한 데서 시작되었다. 회월의 단편 <철야>에 대해서 팔봉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나섰다. >그 결과 이 일편은 소설이 아니오, 계급의식, 계급투쟁의 개념에 대한 추상적 설명에 시종하고 일언일구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었던 것이다. 소설이란 한 개의 건축이다. 기둥도 없이 석가래(서까래)도 없이 붉은 지붕만 입혀 놓은 건축도 있는가? 이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김기진은 박영희의 단편소설인 <철야>가 계급의식의 선전, 즉 내용전달에 급급한 나머지 제대로 문학적인 형상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 ‘소설’이 아니라 ‘추상적 설명’에 불과하다는 것, 즉 소설이 소설로서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무시한 채 ‘너무도 쉽사리 간단하게 처리하였던 것’을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작가적 태도나 작품의 주제가 아니라 그것을 체현하고 있는 작품의 형식적 면모를 강조하던 김기진의 ‘경향’론의 연장선상에서 박영희에 대한 비판이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에 의하면, 프로 문학작품도 그것이 예술의 한 범주인 문학이라고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미적인 구조를 지녀야만 한다는 것이다. 목적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성취하고자하는 수단이 그에 상응하지 못한다면 그 의의를 상실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제 막 조직을 정비하고 목적의식에 입각한 본격적이고 총력적인 문화운동에 들어서려고 하던 카프 내부에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김윤식은 이 논쟁을 두고 프로 문학 내부 지도자끼리의 첫 대립, 김기진의 비판이 프로 문학 전반의 급소에 해당된다는 점, 프로 문예의 방향전환을 준비하는 내적 모순이 표면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박영희는 <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조선지광> 1927.1)라는 반박문을 들고 나왔다. 박영희는 김기진의 입장에서 드러나는 모호함[* 박영희의 글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소설다운 소설을 써 내라는 것인지, 계급문학 운동을 제대로 행하기 위해서 소설의 요건을 갖추자는 것인지 모호했다.]에 대한 추궁을 논의의 핵심으로 펼쳤다. 여기서 박영희는 >프롤레타리아의 전 문화가 한 건축물이라면 프로의 예술은 그 구성물 중 하나임 을 논한 다음 소설로서 완전한 건축물을 만들 시기는 아직 시기상조임을 밝힌다. 또 박영희는 이 글에서 >부르주아 문예비평가는 작품의 구조에 중요한 착점을 두지만 프로 문예비평가는 작품에 나타나는 의식과 xxx대조하여서 프로작품의 가치를 말해야 한다면서, 김기진을 부르주아적 비평가로 규정하고 '''태도의 불선명함'''을 지적하면서 비판했다. 궁극적으로 프로 문예 비평가의 '''태도'''를 문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런 후 회월은 일본의 비평가 청야계길[* 아오노 스에키치(靑野季吉, 1890-1961).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 계열의 비평가.]의 외재적 비평을 이렇게 옮겨놓고 있다. >오늘날 우리 앞에 있는 문예비평은 두 가지 당연한 길이 있다. 하나는 내재적 비평이라고 말한 것이고 하나는 이것에 대응해서 외재적 비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내재적 비평이라는 것은 역시 비평가가 나타난 작품의 내부를 뚫고 들어가서 그 구성요소를 분해하며 그 결합을 조사하며 당연히 그 곳에 있어야 할 조화가 없는 것을 지적하며, 내용과 기교의 관계, 그 파탄을 보기도 하는 비평이나, 그것을 설명적 비평 또는 문학적 비평이라고 해도 무관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외재적 비평이라는 것은 나타난 예술작품을 일개의 사회현상으로서, 나타난 예술가를 일개의 사회적 존재로서, 그 현상 그 존재의 사회적 의의를 결정하는 비평이니 이것을 전것과 대립해서 문화사적 비평이라고 해서 무관할 것이다. 이러한 박영희의 반박에 의해 논쟁이 시작되고 박영희가 들고 나온 외재적 비평에 반응하여 여러 비평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김기진이 재비판(<무산문예작품과 무산문예비평>)을 한 것을 포함하여 권구현의 <계급문학과 그 비판적 요소>, 주요한의 <취재의 경향과 제삼층 문예운동>등이 그것이다. 이들의 가세로 프로 문예 작품이 작품으로서의 자질을 갖춰야 하는가 여부를 초점으로 하여 문단의 이목이 모아졌다. 하지만 이 논쟁은 [[김기진]]이 재비판용으로 들고 나온 <무산문예작품과 무산문예비평>을 소설관에 관련된 이론적 입장에서는 아무런 오류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비평가적 태도 면에서 불선명한 점이 있다고 동지들이 지적한다면 사죄를 하겠다고 마무리 지으면서 급작스럽게 끝났다. 김기진은 1927년부터 [[임화]] 등 소장극좌파 문인들이 동경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시작하면서 한결같이 [[박영희]]의 편에 서서 지지하자, 논쟁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자진 철회한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사회주의 운동 세력이 단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명분하에 김복진, 이성태 등이 압력을 넣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논쟁은 표면상의 해결을 보았다. 그러나 소설 미학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상당 기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김기진 역시 ‘추상적인 개념 설명만으로는 소설이 될 수 없다’는 자신의 입론을 강력하게 견지하여 곧이어 <내용과 표현>을 발표하였고, 같은 문제로 박영희도 <문예비평의 형식파와 마르크스주의>를 통해서 자신의 입론을 마련해나갔다. 김기진의 포기로 인한 박영희의 부전승이었다.[* 하지만 몇 년 후 박영희는 자신이 김기진을 논박했던 논리 그대로 임화에게 당했다. 그리고 김기진은 1928년에 떠오른 문학대중화 문제에서 자신의 논리를 피력했다.] 이 논쟁으로 조선프로예맹은 그 지침을 정하고 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박영희가 이론적인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이에 따라 박영희가 주창한 목적문학론 혹은 방향전환론에 의해 제2차 방향전환 이전까지 이북만을 위시한 현장 출신의 문인들과 박영희를 위시한 이론가들의 논쟁이 계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