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칼리파 (문단 편집) === [[오스만 제국|오스만 칼리파]](1517년 ~ 1924년) === 오스만 제국은 칼리파의 정통성을 얻어 사용했지만 큰 의미를 두진 않았고 이미 자칭하고 있었다. 칼리파는 룸 술탄(رُّومُ سلطان)을 비롯한 그저 술탄의 수많은 칭호 중 하나 정도로 취급되었다.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이 의미를 둔 칭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이후 자신이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칭하며 칭한 '룸 카이세리(Rum Kayseri)', 즉 '로마의 황제'라는 칭호였다. 하지만 18세기 말부터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 내 정교회 신자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오스만 제국에서도 이에 대항해 자국내 무슬림 [[밀레트 제도|밀레트]][* Millet. 일종의 종교 공동체로, 오늘날 일부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수민족자치구가 민족 대신 종교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면 된다. 다만 '소수'종교만이 아니라 이슬람을 포함한 모든 종교별로 만들어졌는데, 러시아의 개입도 '너네 투르크가 밀레트인가 뭔가 만들어서 기독교도도 보호한다는데 못 믿겠으니 투르크 황제와 그 꼭두각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대신 우리가 정교도의 보호자 역할을 맡겠다' 라고 선언했던 것. 참고로 프랑스는 한참 전부터 라틴 밀레트, 즉 가톨릭의 보호자 역할을 해왔다.]의 대표자로써 칼리파라는 호칭을 재부각시켰고, 이를테면 러시아와 맺은 '퀴췩카이나르자(Küçük Kaynarca)조약'에서도 오스만측 국가원수를 '칼리파'로 칭하였다. 이후 서구열강의 침략을 받고 있는 이슬람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칼리파를 그들의 대표자 혹은 정신적 지주로 여기도록 외교활동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오스만 제국에서 보낸 밀사들은 [[인도]], [[중국]], [[일본]] 같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바깥에 있는 이슬람 지역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때 밀사로 파견된 사람 중에서 크림 반도 출신의 압뒤레시트 이브라힘(Abdürreşid İbrahim)은 중국에 거주하는 위구르를 비롯한 무슬림들에게 파견되는 와중에 [[조선]]과 [[일본]]을 들러 이 지역의 상황을 오스만 제국에 보고하기도 했다.] 또한 칼리파를 오스만 제국이 계승하면서부터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도 한동안은 [[무슬림]]들이 [[메카]]를 순례할 때, 고향을 떠나서 제일 먼저 칼리파가 살고 있는 [[이스탄불]]을 순례한 다음에 메카로 떠나는 풍습도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술탄이자 칼리파였던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이 1922년 [[케말 파샤]]에 의해 퇴위당하면서 술탄제는 폐지되었지만, 칼리파 직위만은 사촌 [[압뒬메지트 2세]]가 이어받았다. 그러나 킬라파트 운동[*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시작되어 오스만 황실과 칼리파 제도의 유지를 요구하던 범이슬람 운동이다.] 회원들이 당시 총리였던 [[이스메트 이뇌뉘]] 명의 앞으로 오스만 황실을 복원하고 칼리파 신정체제 수립을 요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 사건이 터지면서 칼리파 제도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한 튀르키예 정부는 불과 1년 4개월 뒤인 1924년 3월 3일 칼리파 제도를 완전 폐지하였고, 결국 칼리파 직위는 더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헤자즈 왕국]]의 군주이자 [[하심 가문]]의 수장인 후세인 빈 알리가 칼리파를 칭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