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캘리포니아 (문단 편집) === 알타 칼리포르니아 === >[[파일:캘리포니아고지도.jpg|width=100%]] >---- >1720년 프랑스에서 제작한 캘리포니아의 고(古)지도. 당시 유럽인들이 캘리포니아를 섬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이 지역에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의 칼리포르니아(Las Californias) 주가 설치된 것이 그 시초이다. [[스페인 제국]] 식민지 기간 여러 선교사와 이민 그룹(Pueblos)이 정착했으며 샌디에이고(1769),[* 샌디에이고 깃발에 있는 년도 [[1542년]]은 로드리게스 카브리요(Juan Rodríguez Cabrillo)가 이끄는 스페인 탐험대가 샌디에이고 지역을 최초로 도착한 해로, 도시 자체의 성립 년도는 1769년으로 본다.] 샌프란시스코(1776), |산호세(1777), 로스앤젤레스(1781), [[산타바바라]](1782) 등이 이 시기 건설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활약한게 포르톨라가 이끈 원정대와 스페인 [[프란치스코회]]로, 이들은 30여년간 미션(Mission)이라 불리는 선교기지 겸 개척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최종적으로는 남쪽의 샌디에이고부터 북부 소노마 카운티까지 수십개의 미션을 건설했고, 이 미션들이 현재 '''캘리포니아 대도시들의 시작이 되었다. '''[* 이 과정에서 이들이 개척한 도로는 엘 카미노 레알(El Camino Real)로 불렸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남북을 가르는 101하이웨이가 되었다. 이들의 일원인 주니페로 세라(Junipero Serra) 신부는 2015년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기독교)|성인]]으로 시성되었고, [[미국 국회의사당]] 기념홀(Statuary hall)에 캘리포니아 대표로 동상이 설치되었다.] 이후 스페인 정착 인구가 늘어나면서, 1804년 기존의 칼리포르니아(Las Californias)에서 샌디에이고 남쪽을 기점으로 알타 칼리포르니아(상 칼리포르니아)와[* Alta California. 상(上)칼리포르니아. 남쪽의 바하칼리포르니아(=하(下)칼리포르니아)와 구분되는 명칭이다.] [[바하 칼리포르니아]](하 칼리포르니아)로 분할되었다. 그 후 1821년,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이 독립하면서 생긴 신생 멕시코의 알타칼리포르니아 준주가 되었다. 이 당시 알타칼리포르니아는 지금의 캘리포니아 주보다 훨씬 커서, 지금의 [[네바다]] 주 전체와 [[애리조나]] 주, [[유타주|유타]] 주의 대부분, [[콜로라도]] 주와 [[와이오밍]] 주의 일부분을 포함하는 거대한 준주였다. 근데 인구는 엄청나게 적어서 미국으로 할양되기 직전인 1847년에 원주민 제외 인구가 85,000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주가 아닌 준주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당시 멕시코는 남쪽 국경지대 분쟁과 산적한 국내문제로 캘리포니아 지역을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멕시코로 통치권이 이양되었지만 여전히 캘리포니아 각지에 자리잡은 스페인계 미션(Mission)들은 1830년대까지 캘리포니아 면적의 6분의 1을 통제했다. 이들 스페인계 미션들은 알타 칼리포르니아의 통제권이 스페인에서 멕시코로 넘어간 후에도 스페인 본토에서 계속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파견되었으며, 인근의 정착촌과 원주민 마을, 군사기지를 흡수하여 하나의 거대한 도시를 이루었다.[* 세속화 법령이 시행되기 직전인 1832년에도 캘리포니아 스페인 선교부는 2만명이 넘는 원주민을 거느리고 가죽, 수지, 양모, 직물을 생산했고 가죽 제품은 미국 동부, 남미, 아시아로 수출했다.] 샌디에이고부터 샌프란시스코까지 산재한 이런 미션들은 멕시코 정부에게 큰 위협이 되었으며 실제로 스페인계 미션을 후원하던 스페인 본국은 이 시점까지 멕시코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페인은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페루 등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이 일으킨 식민지 독립전쟁에서 패전하고 아메리카 식민지들의 지배권을 잃은 이후에도 이전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이들 아메리카 신생국들을 반란 세력으로 간주하며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가 1836년에 와서야 옛 식민지였던 멕시코와 여타 중남미 국가들을 독립국으로 승인했다.] 결국 1833년 멕시코 정부는 세속화법(Mexican secularization act of 1833)을 통과시켜 강제적으로 이들 스페인계 미션 [[세속화]]에 나섰다. [[오렌지 카운티]] 산 후안 미션을 시작으로 1846년까지 점진적으로 스페인계 미션 통제 하에 있던 토지와 재산을 분할하고, 미션에 속해있던 군인, 스페인 정착민, 사제, 원주민들에게 토지를 불하하였다. 이들은 캘리포니아 해안과 내륙분지의 토지를 불하받아 랜초(Rancho)라 불리는 농장주, 목장주, 또는 인력을 제공하는 노동자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