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커피 (문단 편집) === 유럽으로의 전파 === ||[[파일:오스만 카페.jpg|width=600]]|| || [[오스만 제국]]의 카흐베 하네 (커피하우스) || 이런 여러 가지 상황 덕분에, 이슬람권에서는 커피가 널리 사랑받을 수 있었다. 흔히 영국을 보고 [[전쟁]]도 [[티타임]] 후에 한다 할 정도로 차에 목매는 나라로 묘사하지만 당시 이슬람 세력의 커피 사랑 역시 이에 지지 않아서, 그들이 유럽과 싸울 때 전장까지 커피나무를 가지고 와 심어서 유럽에 커피가 본격적으로 퍼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실 영국도 커피가 휩쓸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커피가 평민들에게까지 보급되다 보니 귀족들이 차별화하느라고 차로 돌아선 것. 그 외에도 커피를 여성들을 못 마시게 했다가, 여성들이 차별에 화가 난 상황에서 차가 도입되니까 차를 마시고, 점점 상류층의 기품 넘치는 취미가 되면서 차에 목숨을 걸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부분은 [[홍차]] 항목 참조. 근데 [[홍차]]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슬람권 사람들은 홍차 (일명 black tea)도 영국과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많이 마신다. 현존하는 [[유럽인]]의 커피에 대한 첫 기록은 1573년 독일의 학자 레온하르트 라이발프가 [[레반트]](시리아-팔레스타인)를 여행하고 남긴 동방여행기(1582년 저술)에서 현지인들이 '카우베'(chauwe)[* [[튀르키예어]] kahve를 독일식으로 표기한 것]라는 음료를 마신다고 기록한 것이었다. 커피 나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580년 이탈리아의 식물학자 프로스페로 알피니가 이집트를 다녀오고 저술한 이집트 식물(1592년)에서 언급한 것이었다. 16세기 말엽 동방 무역의 거점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커피는 이탈리아 일대에 소개되었다. 커피가 이슬람 세력을 통해 알려지다 보니, 기독교권인 [[유럽]]에서는 '이교도들'이 마시는 음료인 커피를 나쁘게 인식했다. 이교도의 음료, 이슬람의 [[와인]], 악마의 유혹[* 국내 커피 음료 '프렌치 카페'가 이 문구를 광고 멘트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야만인의 음료, 사악한 나무의 검은 썩은 물 등으로 폄칭하며 마시지 말라고 권장했지만, 한번 커피의 맛을 본 사람들은 계속 빠져들었다. 야사에 따르면 대략 1600년, [[교황]] [[클레멘스 8세]]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커피를 공식적으로 금지해달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클레멘스 8세 교황은 직접 커피를 맛본 뒤 "이 사탄의 음료는 왜 이렇게 맛이 좋은가? 이 커피는 이교도 놈들만 마시도록 놔두기엔 너무나도 아깝도다." 하면서 반대자들을 물리치고 공식적으로 '''커피를 [[축복]]함으로써'''[* 커피에게 '세례'를 주었다고도 하는데, 커피를 내리느라 물을 붓는 것을 '세례'라고 장난스럽게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승인하였다고 한다. 이 야사가 실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커피가 대략 이 시점부터 유럽에서 대중화된 것은 사실이다.[*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신앙심이 깊고 경건한 인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우유부단하고 화려함을 좋아하는 면이 있어서 [[교황청]] 재정에 부담을 줄 정도였다. 만약 커피 야사가 사실이라면, 화려함을 좋아하는 성격 덕분에 우유부단함마저 물리치고 커피를 공인하였을 것이다.] 커피는 족쇄가 풀리자 단숨에 유럽을 휩쓸었다. 1616년 커피의 본산지인 모카 항구에 [[네덜란드]] 상인 피터 판 덴 부르크가 나타났다. 그는 기념품으로 커피콩을 본국에 가져가 심었는데, 이는 [[서유럽]]에 뿌리를 내린 첫 커피나무였다. 이루 커피는 네덜란드에서 유행하였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모카에 상관을 세우게 되었다.[* 본래 [[아덴]]에 세웠는데 1620년 현지에서 [[내전]]이 터지자 모카로 이전한 것이다.] 영국에선 1627년, 이탈리아의 [[파도바]] 대학에서 공부하다 커피를 접한 [[영국인]] 해부학자 [[윌리엄 하비]]에 의해 커피가 처음 도입되었다. 프랑스에선 1644년 [[마르세유]]의 상인 비엘 드 라 로크가 도시에 커피를 들여오기도 하였지만 도시 외부로 퍼지진 않았다.[* 다만 마르세유 자체에선 1660년경엔 톤 단위의 커피콩 거래가 나타나기도 하는 등 커피가 대유행하였다.] 한편 1635년 북에멘의 라시드 왕조가 오스만 제국군을 몰아내고 모카, 아덴 등등을 점령해 예멘을 통일한다. 이로써 유럽 상인들은 오스만 제국을 거치지 않고 예멘과의 직접 교역을 통해 커피를 들여올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교역은 1640년을 시작으로 1663년 정기적인 수출로 자리잡았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외에 영국 레반트 회사 등도 동참하며 모카는 커피의 대명사로 유럽에 알려졌다. || [youtube(0af00UcTO-c)] || || [[TED]] 강연 / "좋은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 >([[카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진은 여기서 10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서 불과 몇 분 전에 찍은 겁니다. 바로 여기 [[옥스퍼드(영국)|옥스포드]]에 있는 '그랜드 카페'입니다. 제가 이 사진을 찍은 이유는 이곳이 바로 1650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커피 전문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우 유명한 곳입니다. 제가 이곳을 소개한 것은 역사적인 영국의 [[스타벅스]] 같은 커피 전문점을 안내해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영국의 커피 전문점이 이제는 계몽주의라고 부르는 지난 500년 동안의 위대한 지적 [[개화기]]를 성장시키고 퍼뜨리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 >([[중략]]) > >커피 전문점이 [[계몽주의]]의 태동에 그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의 일정 부분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마셨던 것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커피나 홍차가 [[영국 문화]]로 전파되기 전에는 지식인이건 대다수 농부건 할 것 없이 다들 날이면 날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술]]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술은 주간에 마시는 음료였습니다. 아침 먹으면서 [[맥주]] 조금, 점심에는 [[와인]] 약간, 특히 1650년 경에는 여기에 약간의 [[진(술)|진]]도 곁들이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거기에 약간의 [[맥주]]와 [[와인]]을 더하죠. > >그 시절 [[물]]은 마시기에 [[석회수|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술이 건강을 위해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다만 현재는 수질 때문에 술을 마셨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연구가 계속 나온다. 사실 술을 빚는 데에 물이 상당량을 차지함을 생각해보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일상식으로 소비할 만한 품질의 술을 빚으려면 물도 적합한 품질이어야 한다. 자세한 것은 [[맥주]]와 [[와인]] 항목 참조. ] 그리고 사실상 커피 전문점이 번창할 때까지 실제로 '''전체 인구가 하루종일 술에 취해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땠을지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이 살면서 만일 온종일 술을 마신다면 말이죠. [[알코올 중독|뭐 더러 그런 분도 있으시겠지만]]. > >그러다 '''여러분의 삶에서 억제제를 흥분제로 바꾸었다면''' 당연히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겠어요? 여러분은 좀 더 영리해지고 기민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국이 [[홍차]]나 커피 같은 음료를 마시면서부터 [[계몽주의|위대한 ]][[르네상스|혁신]]이 [[산업 혁명|꽃을 피웠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 > - [[미국]]의 작가 스티브 존슨. 그 이전까지 식수 품질이 좋지 못해 대용으로 [[중세]]까지는 술을 마시다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이후부터 술에서 깬 유럽인들은 [[르네상스]]를 이루어냈다는 [[TED]] 강연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16세기 함부르크 사람들은 1년에 맥주 약 200갤런(757.082리터)을 마셨었다.[* 출처 : 케임브리지 독일사][* 즉, 하루에 약 2리터 가량.]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 1년에 33갤런 수준으로 급감했다. 이런 대체음료가 나오기 전에는 음주량이 쉽게 줄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높았던 술 소비량이 유의미하게 감소한 시기는 콜라, 홍차가 퍼진 이후다. 이렇듯 커피는 주로 이슬람권에서 전파가 되었기에, 19세기까지만 해도 아라비카를 비롯하여 이슬람권 커피가 [[유럽]] 커피를 휘어잡았다. 현대 카페의 원형인 카흐베하네[* [[튀르키예어]]로 커피를 뜻하는 Kahve와 [[페르시아어]]로 집을 뜻하는 Hane의 합성어이다. 참고로 현대 튀르키예어로는 커피가게라는 뜻의 Kahveci(카흐베지) 혹은 책읽는 곳이란 뜻의 Kıraathane 크라앗하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재밌는 점은 카흐베지에서나 크라앗하네에서나 사람들은 커피보단 차를 더 자주 마신다는 점이다(...) [[튀르키예]]어로 아침식사를 뜻하는 Kahvaltı(카흐발트)도 원래는 커피를 마시기 전에 가벼운 식사를 하던 데서 유래된 말이지만 지금은 여전히 아침식사를 카흐발트라 하면서도 커피 대신 차를 마신다.] (커피 하우스)도 중동을 중심으로 퍼졌는데, 유럽에선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에 처음 생겼다.[* 오늘날 시르케지역 근처와 이집트 바자르 사이에 위치한 타흐타칼레(Tahtakale)라는 곳에서 최초로 영업을 시작했다는데, 현재는 그 장소가 남아있지 않지만 한때 이 일대가 카페거리처럼 카흐베하네들이 즐비하게 늘어졌다고 한다. 근처에 총리대신의 관저와 톱카프 궁전, 에미뇌뉘 항구를 오가는 상인들과 갈라타의 외국대사와 수행원들, 페네르와 페라의 룸인들이 서로 만나는 번화가라 금방 커피문화가 퍼질 수 있었다.] 1554년 [[시리아인]] 하킴과 샴스가 개업하였다고 한다.[* 아르메니아계 시리아인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둘 다 [[아랍어]] 이름이고, 무슬림 이름이라 신빙성은 낮다.] 카흐베하네는 17세기 무렵부터 이스탄불에 보편화되었는데, 늘어나는 카흐베하네에 대한 불만이 생겨났다. 1611년에는 이집트 총독이 카흐베하네에서 반정부적인 언동이 많다고 커피 판매와 같이 카흐베하네를 금지했다가 커피를 좋아하던 술탄 [[아흐메트 2세]]의 분노를 사서 [[총독]]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 특히 17세기 오스만 제국에선 특권 계급인 [[예니체리]]와 황태후 등 [[하렘]]이 무능한 술탄 대신 정국을 주도했는데, 이들과 결탁하여 사치와 부패를 이어가던 세력이 바로 커피의 확산을 주도한 수피들이었다. 카흐베하네는 이러한 수피들의 거점이었고, 동시에 예니체리의 군대 외 사업으로서 그들의 고수익원이었다. 당시 이스탄불의 카흐베하네는 대부분 예니체리 수중에 있었다. 따라서 기강이 해이해지는 제국을 바로잡고자 출현한 [[이슬람 원리주의]] 계통인 카디자델리 파는 이를 매우 혐오하였다. 그들은 오랜만에 출현한 야심찬 술탄 [[무라트 4세]] 시대에 집권 세력이 되었고, 술탄이 실권을 장악한 이듬해 1633년에 1차 커피 금지령을 내리며 카흐베하네에 탄압을 시작하였다.[* 후기인 18세기 이후에는 우후죽순으로 늘어난 카흐베하네를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걸 깨달은 오스만 조정도 정책을 바꿔서 동네 주민들에서 뽑거나, 위장전입을 시킨 요원들을 이용해 카흐베하네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용의선상의 인물의 행보, 동네에서 퍼지는 소문 등을 수집해서 경찰에 보고하는 프락치들을 심어서 여론을 감시했다.] 무라트 4세 본인 역시 커피 자체는 좋아했지만 카흐베하네에서 벌어지는 지식인들의 비난은 싫어했다고. 가혹한 금주령, 금연령으로 유명했던 그는 커피에 대해서도 원스트라이크 아웃을 적용해 약 3만여 명이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이에 대한 반동인지 무라트 4세 사후 즉위한 술탄 이브라힘은 예니체리에 의해 폐위되었다. 뒤이어 옹립된 메흐메트 4세의 시대엔 1651년 태후 쾨셈이 암살되고 카디자델리 파를 후원하던 [[쾨프륄뤼 가문]]의 섭정이 시작되며 카흐베하네에 대한 탄압이 재개되었다. 1656년 지정된 2차 커피 금지령을 통해 쾨프륄뤼 가문은 정적들을 제거하며 무소불위의 권위를 누렸다. 비록 1차와는 달리 투 스트라이크 아웃제로 바뀌긴 했지만 정치적 이용은 극대화된 경우였다. 오스만 제국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마르세유 등지에 커피가 보급되는 동안 '위대한 세기'를 맞던 프랑스 왕실과 파리는 유행의 물결에서 비켜나 있었다. 비록 스페인을 통해 1615년 코코아를, 네덜란드를 통해 1636년 차가 보급되어 유행을 탔지만 커피는 아직이었다. 그러던 1669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계획하던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4세는 측근 뮈테페리카 쉴레이만 아아(Müteferrika Süleyman ağa)를 파리에 보내 루이 14세에게 친서를 전달하였다. 쉴레이만 아아는 파리에 집을 빌려 튀르키예식으로 꾸미곤 방문자들에게 커피를 아낌없이 대접했는데, 이는 엄청난 인기로 이어져 귀천을 막론한 파리 시민들이 그의 임시 거처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비록 쉴레이만 아아는 당초 목적인 프랑스와의 동맹 강화에는 실패했지만[* 베르사유 궁에서 접대 받을 때에 루이 14세가 환영식의 소감을 묻자 튀르키예 황궁이 훨씬 호화롭다 답하여 태양왕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결국 쉴레이만 아아가 전권대사가 아닌 일개 사절에 불과함을 깨달은 루이 14세는 그에게 귀국을 명한다. 다만 대튀르크 전쟁에서 참전하지는 않았다.] 커피와 [[튀르크리]], 즉 튀르키예 문화에 대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사실 루이 14세도 커피를 즐겼기에 커피콩 선물 자체는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4년 후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 ([[대튀르크 전쟁]])에 나선 오스만 제국은 빈에서 참패를 겪고 후퇴하였다. 크로와상과 윙드 후사르의 활약으로 유명한 이 전투에서 황급히 후퇴한 오스만 제국군은 대부분의 보급품을 놓고 갔는데, 그중엔 대량의 커피 포대도 있었다. 오스트리아 군은 전리품인 커피콩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는데, 사망자까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커피 원두를 구하긴 쉽지 않았다. 결국 커피콩은 공방전 도중 [[튀르키예군]]으로 변장해 내부와 폴란드 원군 측에 소식을 전달한 폴란드 출신의 병사 콜시츠키에게 상당 부분 돌아갔다. 그는 빈에 '파란 병 아래 집'이란 카페를 열었고, 이는 빈 최초의 카페이다.. 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이미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1665년 빈에 당도한 오스만 사절에 의해 커피가 전해졌고 공방전 4년 전엔 1685년에 이미 아르메니아인 요하네스 디오다트가 빈에 카페를 열었다고 한다. 영국에선 그보다 앞선 1650년 유대인 제이콥이 옥스퍼드에 개업한 카페가 최초였는데, 이는 단명하였고 2년 후 아르메니아인 파스카 로제가 런던에 오픈한 커피하우스가 대성공하였다. 1680년대 당시 런던 인구는 50만이었는데 커피하우스는 3천 곳이 있었다고 한다. 영국에서의 커피하우스는 정치적 의견을 교류하는 장소로 애용되었고, 이슬람권의 영향으로 술을 팔지 않아 진지한 대화가 이어질 수 있었다. 1657년 영국은 이후 국가적인 인기를 얻게 되는 음료인 차를 수입하게 되었지만 커피의 위세 하에 별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 그리고 코코아 같은 경우는 영국의 적국인 스페인을 통해 막대한 관세를 거쳐 유통되었기에 역시 인기가 없었다. 한편 커피에 반발하는 계층도 있었다. 부인들이 커피하우스가 남편들을 잡아둔다며 항의한 결과 국왕 [[찰스 2세]]가 커피하우스 폐쇄령을 내렸다가 시민들의 분노에 열흘 만에 철회하기도 하였다. 당시 정치, 학문적 토론이 벌어지던 커피하우스에는 입장료 1페니만 내면 들어갈 수 있었기에 커피를 마시려는 사람들 외에 단순히 수준 높은 대화에 참석하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런던의 주식 거래소 주변의 커피하우스에선 주식 상담이 이루어졌는데, 사람들이 모두 커피하우스에서 상담을 받자 거래소 자체는 한산해지기도 하였다. 무역상들이 모이던 커피하우스에선 고객 유치를 시도하던 중개상들이 위험 부담을 미끼로 하며 보험의 시초가 마련되기도 하였고, 토리당과 휘그당 같은 정당들도 각각 선정한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지지자들을 규합하였다. 17세기 후반 영국 시민 사회의 거점이던 커피하우스는 (비록 신분의 차별은 없었지만) 여성 출입 금지라는 차별성과 네덜란드,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커피 선점으로 영국에선 점차 쇠퇴하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경쟁이 과열된 커피 대신 차 시장을 확보하였고, 이에 영국 정부가 홍차 소비를 촉진하며 커피에 대해 규제를 내리자 커피의 나라는 점차 홍차의 나라로 변하였다. 한편 영국의 커피 사랑이 절정에 달할 무렵인 1672년, 쉴레이만 아아의 방문 후 7년이 지난 파리에도 아르메니아인 파스칼이 개업한 최초의 카페가 문을 열었다. 그외에 길거리 커피 판매상인 칸디오들도 있었다. 파리지앵들은 카페를 애용하였고, [[프랑스어]]였던 카페는 곧 국제적으로 커피를 마시는 장소를 지칭하게 되었다. 1686년엔 바로크 양식의 웅장한 카페 프로코프가 개업하여 중산층에게 사랑받았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한데 모여 백과전서 편집 회의를 개최한 곳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개업한 카페 드 라 레장스[* 레장스는 불어로 섭정이란 뜻. 루이 14세의 조카 오를레앙 공의 저택인 팔레 루아얄 앞에 세워졌는데, 오를레앙 공이 후에 루이 15세의 섭정이 되며 레장스란 이름이 붙여졌다.] 역시 유명하였다. 18세기 초엽 인구 50만인 파리에는 카페 3백여 곳이 있었고,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8년엔 60만 인구에 카페는 1800개에 이르렀다. [[프랑스 혁명]]도 어떻게 보면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5531&cid=59020&categoryId=59025|커피의 위력으로 일으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폐쇄적인 귀족들의 사교 문화인 [[살롱]]과는 달리 [[카페]][* 프랑스에서는 커피를 마시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카페(café)'라고 부르며 카페 문화에 자부심이 큰 편이다. 프랑스 최초의 카페[[https://en.m.wikipedia.org/wiki/Caf%C3%A9_Procope|르프로코프]]]는 지식인뿐만 아니라 서민들이 주로 드나들며 대중적이고 개방적인 편이었던지라,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치열하게 [[토론]]하며 [[계몽주의|개혁의식]]을 키워 간 부르주아의 이론들이 혁명의 기폭제로 이어지게 된 것. 특히 앞서 언급되었던 카페 드 라 레장스의 주인인 [[루이필리프 조제프 도를레앙|오를레앙 공 루이필리프 2세]]는 경찰의 출입을 제한하여 각종 사상가들의 자유로운 의견 교환에 힘썼다. 1789년 7월 12일, 자코뱅 클럽에 속한 카뮤 데물랭이 민중에게 무장 봉기를 연설한 곳도 오를레앙 공의 저택인 [[팔레 루아얄]]에 속한 카페 드 포에였다. 2일 후 시민들은 무기를 들고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며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다. 그외에 북독일의 [[프로이센]]도 1670년 커피가 처음 전해진 후 유행했는데, 특이하게도 여성들의 음료로 인기를 끌었다. 커피 수입으로 국고 유출이 우려되자 [[프리드리히 2세]]가 1777년 커피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으나 일시적이었으며 이후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버금가는 커피 소비국이 되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는 커피를 매우 싫어해 금지령을 내리려 했지만 귀족들도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그는 커피가 몸에 나쁘다고 주장하면서 [[사형수]] [[형제]]들을 종신형으로 살려주는 대신, 각자 커피와 차를 매일 마시게 하여 [[실험]]해 커피가 싫음을 입증하려고 했다. 하지만, 왕은 [[암살]]당하는 통에 실험결과를 보지 못했는데 커피를 마신 사형수 형제가 더 오래 살았고 그 시대에서도 커피가 나쁜 게 아님을 입증하고 말았다. 직접 발견은 아니긴 하지만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카페인]]이 발견되는 것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괴테]]는 독일의 과학자 [[http://en.wikipedia.org/wiki/Friedlieb_Ferdinand_Runge|프리들리프 페르디난트 룽게]]의 친우로, 1819년 당시 25살이던 룽게가 고양이의 동공에 근육 이완 효과가 있는 벨라돈나라는 식물의 추출물을 떨어뜨린 후 동공이 확장되는 실험을 시연했는데, 이에 감명을 받은 괴테가 그에게 아라비안 [[모카]] 커피콩을 선물하면서 '여기에 들어있는 성분을 분석해서 왜 커피가 사람들을 깨우는 효과가 있는지를 알려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룽게는 이 성분을 단순히 커피의 유효성분이라는 뜻으로 카페바제(Kaffebase)라고 불렀으나, 1821년에 룽게와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카페인을 발견한 프랑스의 피에르 장 로비케(Pierre Jean Robiquet), 피에르 조제프 펠르티에(Pierre Joseph Pelletier), 조제프 비어네메 카방투(Joseph Bienaimé Caventou)가 논문을 내고 caféine[* [[프랑스어]]로 커피를 뜻하는 café에 접미사 -ine을 합쳤다.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카페인]]을 caféine이라고 표기한다.]이라는 명칭을 널리 정착시켜서 이쪽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다만, 후에 펠르티에는 룽게가 자기보다 먼저 한발 앞서 카페인을 발견했음을 인정하고 공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