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커피 (문단 편집) === 세계 각국으로의 전파 === 커피 수출로 막대한 이득을 보던 예멘인들은 커피를 독점하기 위해 커피 종자의 반출을 금지하였고 수출할 때에도 구운 커피콩만을 내주었다. 하지만 1685년 [[네덜란드]]가 [[스리랑카]](실론)를 식민화 했을 당시 현지 [[무슬림]]들이 커피나무를 길렀다는 기록을 보아 이미 17세기에 외부로 반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670년대 수피 성인 바바 부단이 메카 순례 후 경유한 모카에서 7알의 커피 열매를 품에 숨겨와 인도 남서부 해안에서 커피 재배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실론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전의 수피 성인 다다 하야트의 사당 근처에 심었는데 단 한 알만이 싹을 틔웠고 19세기까지 이어진 티파카계의 최고급 품종 올드 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편 1619년부터 바타비아를 중심으로 자바에 대한 식민 지배에 나선 네덜란드는 1690년부터 아덴에서 밀수한 커피 재배를 시도하였다. 몇 차례 실패 끝에 1699년 안정적인 재배가 시작되었고 18세기 초엽 자바는 모카에 이은 커피 생산지로 부상하였다. 더 나아가 네덜란드는 1718년부터 [[수리남]]에서도 커피 재배에 나섰다. 한편 당시 커피 열풍이 불던 [[프랑스]]에서 커피 사재기에 나서자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커피가 부족해졌고, 이에 술탄이 대유럽 커피 수출을 금하였다. 그러자 프랑스는 1713년 네덜란드와 위트레히트 조약을 맺으며 [[암스테르담]] 식물원의 커피나무를 입수한 것을 바탕으로 1697년 스페인으로부터 뺴앗은 식민지 생도맹그([[아이티]])에서 재배를 시작하였다. (1715년) 비록 첫 시도는 10년 만에 실패했지만 1723년 카리브 해의 다른 섬 [[마르티니크]]에서 해군 장교 마티유 드 클리외가 티피카 품종 재배에 성공하였다. 이를 다시 [[아이티]][* 본래 카카오, [[사탕수수]] 재배에 주력했으나 1725년의 [[허리케인]]과 1727년의 [[대지진]]으로 플랜테이션이 붕괴하자 아예 커피로 새 시작을 한 것이다.]와 [[과들루프]] 등에 옮겨심어 역시 성공하였고, 1730년대부터 프랑스의 커피 공급은 안정화되었다. 당시엔 [[수에즈 운하]]가 없었기에 모카나 자바로 향하는 노선보다 [[카리브 해]]의 식민지가 훨씬 가까웠고, 이로써 아이티의 커피는 운송비가 적게 들었다. 게다가 노예들의 무상 노동력 덕분에 가격 경쟁에서도 아이티산 커피는 저렴한 값을 자랑, 프랑스는 기존에 수입처이던 중동에 커피를 수출하게 되었다. 1750년 아이티는 전 세계의 커피 중 절반을 생산하였다. 남아메리카 대륙에선 앞서 언급했듯 네덜란드령 기아나인 수리남에서 커피 재배가 시작되었다. 그러던 1722년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죄를 짓고 수리남으로 도주한 물루주라는 사람이 기아나의 연인을 만나는 대가로 수리남의 커피나무를 밀수해주는 계약을 통해 기아나에도 커피가 전해졌다. 그리고 1727년 수리남의 네덜란드 인들과 기아나의 [[프랑스인]]들이 대립하자 남쪽 브라질의 포르투갈 인들이 중재에 나섰다. 그때 파견된 [[포르투갈인]] 프란시스코 드 메료 파리에타가 프랑스 영사 부인을 유혹한 후 작별 선물로 받은 꽃다발에 숨겨진 5그루의 커피 묘목을 심은 것이 후에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국이 되는 브라질에 커피가 들어온 경위라 한다. 다만 파리에타가 금을 주고 밀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커피 재배를 도입하는 과정이 속임수와 권모술수로 얼룩진 것과 달리, [[인도양]]에서는 합법적으로 재배를 시작했다. 1712년 프랑스 사절단이 [[예멘]]을 방문했을 때에 중이염을 앓던 라시드 왕조의 군주 알 마후지 무함마드를 동행한 의사가 치료해 주었다. 보답으로 사절단은 커피 나무를 청하였고 왕은 1715년 프랑스 상인 안벨에게 커피 묘목 60그루를 하사하였다. 그는 프랑스 동인도 회사가 막 식민화한 마다가스카르 인근의 부르봉(레위니옹)섬을 향하였는데, 항해 도중 40그루가 말라죽었다. 나머지 20그루는 현지 수도원 정원에 심었는데 그중 단 두 그루만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이듬해 둘 중 하나도 말라죽고 남은 한 그루가 열매를 맺으며 부르봉 품종의 조상이 되었다. (1716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