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린토스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터키 코린트 그리스 2.jpg|width=880]] 코린토스 아크로폴리스 성채 (아크로 코린트)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이 도시를 세운 사람은 [[시시포스]]. 이후 친부 [[라이오스]]를 죽이고 친모인 [[이오카스테]]를 왕비로 취하게 되는 [[오이디푸스]]가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동침할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코린토스에 버려져 왕의 양자로 들어가기도 했다. 나중에 자신에게 내려진 그 신탁을 들은 오이디푸스는 [[패륜]]을 피하기 위해 양부모의 곁을 떠났지만, 의도치 않게 친부를 죽이고 친모를 취하는 비극이 벌어지고 만다. 그리스 북부와 [[스파르타]]가 자리잡고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지협에 위치하고 있었다. 길목을 꽉 잡고 있는 나라답게 상업이 많이 발전했다. 고대 그리스 세계의 양대 강국인 [[고대 아테네|아테네]], [[스파르타]] 덕분에 덜 알려졌지만, [[콩라인|아테네, 스파르타 다음으로 강대한 폴리스였다.]] 일전에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코르푸|코르키라]]와 앙숙 관계였다. 코르키라도 만만치 않은 해군력을 갖고 있던 터라 그리스사 최초의 [[해전]]에서 코린토스가 패하여 코르키라는 독립하고 경제적 실권도 뜯기게 되었기 때문. 이후 코린토스는 스파르타와 친선 관계를 유지했는데, 스파르타는 코린토스의 해군력과 경제력 때문에 코린토스가 자신들과의 동맹을 취소하고 아테네 편에 붙을까 늘 걱정했다고 한다. 덕분에 아테네가 코린토스와 싸우려는 코르키라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을 때[* 사실 코린토스 역시 아테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다만, 코린토스는 단순히 옛 정을 생각해 아테네가 도와줄 것이라 믿었지만 코르키라는 스파르타 견제라는 좀 더 현실적인 근거로 아테네를 설득했다. 이 사례는 현실적 상황 판단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할 때 가끔씩 인용되기도 한다.] 스파르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그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많은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파일:그리스 터키 도리아.jpg|width=820]] 다만 남아있는 주요 유적인 아폴로 신전의 기둥은 도리아 양식이다.. 건축사에 있어 코린토스 양식의 기둥으로 유명하다. 코린토스 양식의 기둥은 그리스 시대에 매우 유명했던 건축 양식으로, 대학에서 [[고대 그리스]] 역사를 배우면 첫 학기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코린토스 양식의 그림을 외워야 한다. 이 건축 양식은 코린토스뿐 아니라 지금의 [[터키]], 그리스, 남부 [[이탈리아]], 시칠리아, [[에게 해]] 연안을 아우르던 그리스 세계 전체가 쓰던 건축양식이었다. 코린토스 양식 기둥은 이오니아, 도리스 양식과 달리 무척 화려하게 만들어졌다. 기둥 꼭대기를 나뭇잎으로 감싸듯 조각하는데 이 풀은 아칸서스라는 지중해에서 자라는 풀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풍요를 뜻한다. 이렇듯 그리스 세계에서 꽤 유명하고 큰 도시였으나, [[고대 로마|로마]]에 의해 [[카르타고]]와 사이좋게 멸망당하는 신세가 된다. 이는 코린토스가 [[아카이아 전쟁|로마에 대한 반란]]을 주도하여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본보기였다. 코린토스는 카르타고와 똑같이 도시가 파괴당하고 소금이 뿌려졌으며, 주민들은 몽땅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의 코린토스는 그야말로 재수 옴붙은 경우로, 당시 [[고대 로마|로마]]의 정국을 주도하던 인물이 하필이면 그리스 혐오와 대외 강경책으로 유명한 [[대 카토]]였다. 또한 카르타고를 파괴해서 주변국들에게 본보기로 삼자는 것이 이미 로마 내부의 방침으로 세워진 상태였는데 하필 이때 반란을 일으켜 카르타고 파괴하자는 방침에 코린토스도 덤으로 끼게 된 것이었다.] 두 도시는 기원전 146년에 함께 멸망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해는 3년 간에 걸친 [[제3차 포에니 전쟁]] 끝에 카르타고도 같이 멸망했던 해다. 로마에게는 지중해 서부의 카르타고, 동부의 그리스를 완전병탄했던 영광의 해가 된다.[* 그래서 연도에 따른 판도가 나오는 애니메이션형 역사 유튜브를 보면 기원전 146년에 로마가 카르타고(남쪽)과 그리스(동쪽)으로 확 넓어져서 (아직 공화정이지만) 제국이라고 할 만한 판도가 나오기 시작한다.] [[파일:그리스 코리토스 터키.jpg|width=700]] [[파일:터키 그리스 코린토스.jpg|width=700]] 그러나 나중에 로마인에 의해 도시가 통째로 다시 세워지고, 그 결과 이전의 민족과는 관련 없는 새로운 민족이 이주하여 코린토스의 주인이 된다. 중세에도 펠로폰네소스의 관문으로써 전략적 요충지로 중시되었고, 특히 15세기 [[모레아 친왕국]]은 [[오스만 제국]]의 남진에 맞서기 위해 아크로코린트 성채를 보강하고 코린토스 지협에 헥사밀리온을 견립하기도 하였다. 헥사밀리온 유적은 코린트 시와 운하 사이에 일부 남아있다. 펠로폰네소스 지협을 통과하는 [[코린토스 운하]]가 뚫려 있다. 고대로부터 '이 지협을 뚫어버리면 참 편하겠구나!!' 하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아서, 코린토스 운하는 고대에도 수많은 정치가들이 시도하였다. 최초의 작업은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 폴리스의 정치가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기술 부족으로 중단되었다. 그 후 그리스의 여러 정치가들과, [[율리우스 카이사르]], [[칼리굴라]] 등이 이를 시작하였다가 암살당하면서 중단되고는 했다. 제대로 작정하고 뚫어본 건 [[네로]]였는데, 그는 [[유대인]] 포로들을 동원해 양쪽에서 뚫고 가는 공사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중앙에 엄청나게 큰 암석지대를 만났고 이를 도무지 뚫을 수 없었으므로 결국 공사를 포기하고 말았다.[* 당시엔 '''곡괭이질'''로 뚫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때 이후로 계속 보류되어 오다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첨단 기술이 가능해진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운하를 파는 데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