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케테무르 (문단 편집) === 내전을 끝냈지만 나라의 멸망은 막지 못하다 === 1365년 가을, 코케테무르가 황태자와 함께 대도에 도착하여 입궁하자 혜종이 그를 우승상(右丞相)으로 높였다. 이로써 코케테무르는 좌승상인 바시르[* 한자로는 '백살리'(伯撒里)]와 함께 승상이 되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나, 바시르는 코케테무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두 사람의 지위가 엇비슷할지라도[* 엄밀히 따지자면 원의 관직에서는 우를 좌보다 높이 쳐주었으므로 코케테무르가 바시르보다 지위가 약간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관록에서 결정적으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코케테무르의 파격적인 승진은 사람들의 입에 수없이 오르내리게 되었고, 조정의 신하들 중에는 그를 재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코케테무르는 군재(軍才)가 뛰어난 전형적인 장수였지만 내정에는 경험이 전무하여 직책에 걸맞는 일을 해내지 못했고, 그가 지시를 내린다고 해도 그를 꺼리고 무시하는 조정의 구신(舊臣)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코케테무르는 우승상이 된 지 두어 달 만에 자신이 군사를 이끌고 [[장강|강]](江), [[회하|회]](淮) 지역의 [[장사성|적]][[주원장|들]]을 토벌할 수 있도록 조정을 떠나게 해달라고 혜종에게 청했다. 이때 황태자도 혜종에게 군사를 이끌게 해달라고 청했는데[*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도적들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기보다는 코케테무르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견제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황태자를 꺼림칙해하던 혜종은 코케테무르의 손을 들어주어 그를 '''하남왕(河南王)'''[* 참고로 이 하남왕의 작위는 [[몽골 제국]]의 명장 '''[[수부타이]]'''가 받았던 작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부타이는 죽은 뒤에 하남왕의 작위를 추증(追贈)받은 반면 코케테무르는 생전에 받았다는 차이가 있다. 이 일은 당시에 원나라 내에서 코케테무르의 위세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으로 봉하고 나라의 모든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특권을 내려주었다. 코케테무르가 강회 지역의 형세를 살피니 적들의 세력이 모두 강성하여 섣불리 건드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에 혜종에게 하사받은 권한을 통해 나라의 여러 장수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자신의 휘하로 집결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수들이 코케테무르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들 중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이사제'''(李思齊)로, 그는 원래 차칸테무르와 의기투합하여 함께 민병대를 일으킨 인물인데다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워왔었기에 지위가 높았다. 그는 차칸테무르와 함께 [[산시성(섬서성)|섬서]](陕西) 지역의 도적들을 토벌한 뒤 중앙으로 향한 차칸테무르와는 다르게 그대로 섬서 지역에 눌러앉아서 일대의 병권(兵權)을 장악한 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사제는 코케테무르가 자신의 지위를 능가하여 나라의 모든 군대를 지휘하게 되자 속으로 큰 불만을 품었다. 코케테무르의 격문을 받아보게 된 이사제는 크게 분노하여 부하들에게 고함지르듯 소리쳤다. >내가 [[차칸테무르|네 아비]]와 교분을 맺었을 때[* 이사제가 차칸테무르와 함께 홍건적에게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을 때(1352년)를 의미한다.] 너는 머리카락조차도 제대로 마르지 않았던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꼰대|그런데 감히 내게도 격문을 돌려서 명령을 한단 말이냐!]] 이사제는 코케테무르의 격문에 분노했을 뿐 아니라 공흥(孔興), 장량필(張良弼), 토리포[* 한자로는 '탈렬백'(脫列伯)] 등의 다른 장수들과 연합[* 특히 이들 중에서 장량필과 토리포는 원래 베이르테무르의 부장(副將)이었던 인물들이었다. 이사제 또한 차칸테무르를 따르면서 장량필 등과 적지 않은 싸움을 벌여왔었지만, 이제는 코케테무르를 주적으로 삼고 그들과 연합하여 과거와는 이율배반적인 행보를 보인 것이었다.]했고, 그의 본거지인 [[시안시|장안]](長安)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와 코케테무르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적개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이 소식을 들은 코케테무르는 깊게 탄식하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나는 황제의 명령(詔)을 받들어서 나라의 모든 병사들을 모으고자 하는 것인데, 나라를 지키는 장수들이 이렇게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어떻게 도적들을 토벌한단 말인가! 이사제를 필두로 한 섬서의 장수들이 비협조적이고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코케테무르는 일단 자신의 동생인 토인테무르[* 한자로는 '탈인첩목아'(脫因帖木兒)]를 산동에 남겨서 강회 일대의 움직임에 대비하도록 하고, 부장인 좌승(左丞) 이이(李貳) 등에게는 군대를 내주어 [[쉬저우시|서주]](徐州)를 공격하도록 했으며[* 원래 서주는 코케테무르의 세력권에 놓인 지역이었으나 이 무렵에 그곳의 수장이던 추밀원동지(樞密院同知) 육취(陸聚)가 배반하여 [[주원장]]에게 성을 바치며 항복하게 되자 자연히 상실하게 되었다.], 자신은 섬서로 나아가서 명령에 따르지 않고 분란를 일으킨 장수들을 공격했다. 코케테무르는 장량필의 본거지인 녹대(鹿臺)[* [[상나라|은]](殷)의 [[제신|주왕]](紂王)이 재물과 보화들을 모아놓았던 행궁(行宮)이 아니라 [[위수]] 북쪽에 위치했던 거점의 이름이다.]를 맹렬히 공격했지만 이사제, 장량필 등이 힘을 합쳐 필사적으로 저항[* 특히 장량필은 '''자신의 처자식을 이사제에게 볼모로 보내면서까지''' 지원을 구걸하여 그의 협력을 얻어내는 행보를 보인다.]하는 바람에 싸움에서는 줄곧 우위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싸움이 길어지자 원 조정에서는 코케테무르에게 사신을 계속 보내와서 이사제와 화해할 것을 종용했는데, 분노를 이기지 못한 코케테무르는 홧김에 조정의 사신 천하노(天下奴) 등을 때려죽이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코케테무르의 이러한 발호(跋扈)를 경계하게 되었다. 1367년 가을, 혜종이 명령을 내려 황태자에게 모든 군대를 통솔하게 했고, 코케테무르에게는 군사를 동쪽으로 옮겨 강회 지역을 토벌하도록 했으며, 이사제는 군대를 옮겨 [[쓰촨성|천촉]](川蜀)을 평정하도록 명령했지만 모두가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때 코케테무르의 부장이었던 '''[[맥고]]'''는 코케테무르가 조정에서 내린 명령을 거듭 따르지 않자 그가 신하된 자로서의 도리를 잃고 더 이상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서 코케테무르를 배신하는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맥고는 코케테무르에게서 위휘(衞輝)[* 현재의 허난성 후이셴시(輝縣市)], [[안양시(중국)|창덕]](彰德)을 탈취했으며, 그곳들 중 창덕을 자신의 본거지로 삼았는데, [[백도어 플레이|창덕은 코케테무르가 장수들에게 격문을 돌릴 때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었다]]. 맥고가 코케테무르의 죄목들을 나열하여 조정에 알리고[*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에 따르면 이 일을 관보(關保)가 한 것으로 나오지만 《[[원사(역사책)|원사]](元史)》를 비롯한 다른 역사서들에는 맥고가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원사》등에 따르면 관보는 1367년에는 대부분의 기간동안 코케테무르의 명령을 따르다가 연말 무렵에 조정에서 관직을 받고 활동을 중단한 것이 전부이다. 관보는 그 이듬해인 1368년부터 코케테무르에게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기 때문에 1367년에는 맥고처럼 주도적으로 코케테무르를 배신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조정에 코케테무르를 고발한 행위는 속자치통감 이외의 다른 역사서에 기술된 것처럼 맥고가 한 일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이에 따라 이 문서에도 맥고로 기술한다.] 코케테무르를 맹렬하게 공격하자 조정에서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무군원'''(撫軍院)[* 베이르테무르를 토벌하여 최강의 군벌로 자리매김한 코케테무르를 내심 껄끄럽게 생각하고 견제하려던 혜종과 코케테무르에게 원한을 품은 황태자가 힘을 합쳐 구상한 [[병크|합작품]]이었다.]을 설치하고 황태자에게 그 관청을 관장하게 하면서 '''나라의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이건 뭐 병신도 아니고|오로지 코케테무르를 막는 데에만 전념하게 하였다]].''' 이쯤만 되어도 코케테무르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조정에서는 코케테무르를 끝장낼 생각을 가졌던 것인지 계속해서 그를 압박하는 명령들을 잇달아 내렸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코케테무르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맥고를 충신으로 칭송하고, 갖가지 관직과 칭호들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맥고가 코케테무르에게서 빼앗은 세력권까지도 그대로 인정해주어 코케테무르의 다른 부하들도 주장을 배신하고 조정의 편에 서도록 유도하였다. 코케테무르는 원래 혜종으로부터 나라의 모든 병사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었고, 당시에도 그 권한이 똑같이 유지되었지만 무군원의 설치로 인해 그의 권한은 자연스럽게 황태자에게 이양되어 유명무실해졌다. 특히 무군원에서 산동, 산서, 하남, 하북 지역을 맡을 사령관들을 각기 다른 사람들로 임명하는 바람에 코케테무르의 지휘권이 흩어져버렸고, 이 명령으로 인해 코케테무르는 섬서에서의 싸움을 그만두고 산서의 [[진청시|택주]](澤州)로 물러나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코케테무르에게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무군원에서 산서 지역의 사령관으로 임명한 장수가 명령이 내려진 뒤에 얼마 못가서 죽은 것이었는데, 그로 인해 산서 지역만큼은 코케테무르가 자연스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사실 산서의 중심지인 태원이 코케테무르의 오랜 본거지였던데다 그가 베이르테무르와 싸우면서 양성했던 정예병들이 일대에 포진해 있었으므로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 다른 장수를 보낸다고 해도 산서 지역은 장악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코케테무르를 따르는 관료들에게 조정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 명령과 더불어 코케테무르의 세력을 줄이기 위한 갖가지 공작들이 음지와 양지를 가리지 않고 벌어졌다. 조정에서 벌인 공작들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코케테무르의 부장이던 '''[[관보(원나라)|관보]]'''와 이경창(李景昌) 등을 조정으로 소환한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설득하여 코케테무르를 따르지 않게 하였고, 그들이 설득에 응하면 그 대가로 높은 관직과 막대한 양의 재물을 포상으로 주었다. 특히 관보는 조정으로부터 [[공작(작위)|허국공]](許國公)의 작위를 하사받은 후 코케테무르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코케테무르가 내리는 명령과 지시도 더 이상 듣지 않았다. 결국 관보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맥고와 힘을 합치고 코케테무르를 공격하게 된다. 관보의 배신은 맥고의 반란과 함께 코케테무르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관보와 맥고 두 사람은 모두 싸움을 잘하는 효장(驍將)이었던데다[* 두 사람 중 관보는 용맹이 뛰어났으며, 맥고는 용병술에 능하였다.] 차칸테무르가 활약할 때부터 활동하여 공을 많이 세워왔었기에 코케테무르의 군대 내에서 지위가 높은 거물들이었다. 두 사람의 배신으로 인해 코케테무르의 군사력이 약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굳건하게 마련했던 산서 지역의 기반까지도 흔들리게 되었으며, 두 사람과 코케테무르의 혈투는 나라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코케테무르는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들이 굉장히 불합리하다는 것과 자신이 명령을 감당하기 버겁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전에 저지른 잘못들이 있어서 그랬는지 조정의 명령들에 순순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끝내 섬서의 장수들에게 본거지에서 나와 동쪽으로 진군하여 그를 압박하라는 조정의 명령이 내려지자 코케테무르도 마침내 크게 분노하게 되었다. 1368년, 조정에서는 중서좌승(中書左丞) 손경익(孫景益) 등의 관리들을 태원으로 파견하여 그곳에 부임하도록 했지만 코케테무르는 부하들을 보내서 태원으로 오는 조정의 관리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버렸고, 이 때문에 그동안 표면적으로나마 코케테무르의 권위를 인정해줬었던 조정의 태도가 완전히 돌변하게 된다. 그러한 태도는 다음과 같은 혜종의 명령에서 잘 드러난다. >코케테무르는 원래 차칸테무르의 종실(宗室)이 아니었지만 짐(朕)이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서 그에게 차칸테무르의 관직과 임무를 물려받게 해주어 후세에 길이 남을 공을 세우도록 장려했다. 그뿐 아니라 재상의 자리까지 내주어 나라의 관청들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그에 더하여 코케테무르를 왕으로 높여서 나라의 군대를 오로지하도록 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코케테무르는 짐의 총애만을 믿고 방자해져 제멋대로 굴면서 외적을 토벌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산시성(섬서성)|관섬]](關陝)에서 아군과 병사를 다투어서 그 지역을 얻으려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다. 맥고가 대의(大義)를 외치며 코케테무르의 간사함을 들춰내려 하고, 관보는 코케테무르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고 오로지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있으니, 두 사람은 코케테무르의 죄악을 조사하여 나라의 법이 바로 세워지는 것을 바라는 충신들이다. 토로[* 한자로는 '독로'(禿魯)]와 이사제는 군대를 이끌고 동남쪽으로 내려와 충신들과 힘을 합치고, 짐의 뜻을 받들어 코케테무르를 토벌하여라.[* 원문을 의역한 것이다. 원문: 擴廓帖木兒本非察罕帖木兒之宗,俾嗣職任,冀承遺烈,畀以相位,陟以師垣,崇以王爵,授以兵柄,顧乃憑藉寵靈,遂肆跋扈,搆兵關陝,專事吞併。貊高倡明大義,首發姦謀,關保弗信邪言,乃心王室,陳其罪惡,請正邦典。今禿魯、李思齊,其率兵東下,共行天討。] 코케테무르가 그동안 형식적으로나마 갖고 있었던 하남왕의 왕작은 박탈되었으며, 차칸테무르의 옛 장수였던 위새인불화(魏賽因不花)도 코케테무르의 토벌에 추가적으로 투입되었다. 섬서 지역을 지키던 장수들은 방어에 성공하긴 했어도 코케테무르와의 싸움에서 밀렸었기에 별다른 반격을 해보지도 못하고 수세로 일관했었지만 조정의 압박과 숨막히는 견제로 인해 코케테무르의 세력이 이전과 다르게 볼품없어지자 관보, 맥고 등과 연합하여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 그를 압박하니 코케테무르의 세력권은 날마다 그들에게 잠식당했다. 결국 코케테무르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택주에서 [[린펀시|진녕]](晉寧)으로 달아나니, 관보와 맥고가 그 틈을 타서 택주와 [[창즈시|노주]](潞州)를 순식간에 장악해버렸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주원장]]이 [[장사성]]을 멸망시켜 강남을 평정하고 [[명나라|명]](明)을 건국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의 대장군 [[서달]]이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북벌에 나서고 있었다. 그는 이미 산동 지역을 모두 평정한 뒤 중원을 향해 진격해오고 있는 중이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이사제는 코케테무르에게 사람을 보내서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하북에까지 군사를 이끌고 나왔던 일은 본심이 아니었다]]고 사죄하는 한편, 인근 지역을 대대적으로 약탈한 뒤 본거지를 지키기 위해 섬서로 회군한다. 한편 코케테무르에게 가장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서 그의 기반 세력권이었던 산서 지역을 대부분 수중에 넣은 관보와 맥고는 남쪽에서 무서운 기세로 북상하는 명의 대군을 막을 생각을 하기보다는 코케테무르의 얼마 남지 않은 영역인 진녕과 태원을 마저 공격해서 무너뜨리고 코케테무르를 완전히 없애버리고자 하였다. 코케테무르는 두 사람이 한창 산서 지역을 공격해왔을 때 싸우는 대신 성을 비우고 병사와 물자들을 챙겨서 달아나는 행위를 반복했었으며, 두 사람이 싸워서 결판을 내자는 내용의 글을 보내와도 무시하였었다. 그렇게 불리한 싸움들을 계속 피한 코케테무르는 그의 세력권을 대부분 잃게 되었지만 병력과 물자만큼은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다. 한편 맥고 쪽은 점령하는 지역이 늘어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병사들에게 공급할 물자가 부족해지게 되어 약탈로 물자를 충당해야 하는 열악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코케테무르는 맥고의 군대에 간첩을 심어서 그들의 동향을 살피고 반격의 시간을 기다렸는데, 맥고가 군사를 이끌고 기현(祁縣)[* 현재 [[산시성(산서성)|산시성]](山西省) [[진중시]](晉中市) 치현(祁縣)]을 약탈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코케테무르는 밤을 틈타 재빠르게 군대를 일으켜 기현에서 맥고의 군대를 급습하였고, 이 한 번의 싸움에서 코케테무르는 관보와 맥고의 군대를 크게 쳐부수고 두 사람을 모두 붙잡는다. 차칸테무르와 베이르테무르의 싸움으로 시작되었던 원의 기나긴 내전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붙잡힌 맥고의 무리 중에는 조정에서 파견된 [[다루가치|단사관]](斷事官)이 있었는데, 코케테무르는 그를 조정에 돌려보내어 혜종에게 두 사람을 어떻게 처분할 지 묻게 하니 혜종이 다음과 같은 글을 내렸다. > '''[[우디르급 태세전환|관보와 맥고는 멋대로 병사를 일으킨 간첩이니, 마땅히 군법에 따라 처형하라.]]''' 이 명령이 전해짐과 동시에 관보와 맥고는 그대로 코케테무르에게 살해당하니, 이때가 윤7월 초하룻날[* 양력으로는 8월 14일]이었다. 혜종은 코케테무르가 원한을 품고 이긴 기세를 몰아서 대도를 공격할까봐 매우 두려워했고, 결국 코케테무르를 압박하던 기존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코케테무르를 견제할 목적으로 세웠던 무군원은 결국 폐지되었으며, 무군원의 설치를 제안했던 핵심 인물들 중 한 사람인 바얀테무르[* 한자로는 '백안첩목아'(伯颜帖木兒)]는 혜종의 명령으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코케테무르의 심복들인 손저(孫翥), 조항(趙恒)이 석방되었고, 조정에서 코케테무르를 견제하고 비방하는데 앞장섰던 관리들은 모두 삭탈관직되어 대도에서 쫓겨났다. 코케테무르는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바뀐 조정의 동향을 전해듣고 혜종에게 글을 올려 자신의 정성과 충성심을 밝히니 혜종 또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음을 밝히면서 예전에 코케테무르가 저질렀던 잘못들은 물론이고 그를 압박하기 위해 내렸었던 조정의 모든 명령들도 없던 일로 하겠다고 회답했다. 황제는 추가적으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박탈했었던 코케테무르의 옛 관직과 작위들을 모두 회복시키고]] 위휘, 창덕을 탈환하도록 명령했지만 이때는 이미 명의 대군이 중원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대도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다. 이 무렵에 서달의 군대는 이미 [[톈진시|직고]](直沽)까지 무너뜨린 상태였다. 명군이 대도로 다다를 무렵에 코케테무르는 군대를 추스르고 태세를 정비하기 위해 기녕(冀寧)[* [[타이위안시|태원]]의 다른 이름이다.]으로 물러나고 있었는데,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의 군대가 온전히 정비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군대를 이끌고 간다고 해도 나라를 구원하지 못할 것임을 알았으므로 대도로 가는 대신 그대로 기녕으로 물러났다. 코케테무르가 기녕에 도착한 날, 대도로 이르는 관문인 [[퉁저우구(베이징시)|통주]](通州)가 명의 북벌군에게 함락당했고,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혜종은 2일 뒤에 가속들과 궁녀들을 데리고 대도를 빠져나와 몽골 초원을 향하여 북쪽으로 도주했다. 마침내 음력 8월 2일[* 양력으로는 9월 14일], 서달이 도성(都城)의 제화문(齊化門)을 열고 대도에 입성하니 이로써 원이 멸망하게 되었다. 코케테무르가 관보와 맥고를 격파하여 기나긴 내전을 끝낸 지 딱 한달만의 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