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케테무르 (문단 편집) === [[서달]]과의 싸움에서 연달아 패배하다 === 코케테무르는 원이 망한 뒤에도 계속해서 태원을 근거지로 삼아서 그곳을 지키고 있었는데, 때마침 명의 장수 [[탕화]] 등이 산서로 침입하여 회경(懷慶)[* 현재의 허난성 친양시(沁陽市)]을 무너뜨리고 택주, 노주의 항복을 받아내며 진격해오고 있었다. 코케테무르는 부장 한찰아(韓札兒)에게 군대를 내주면서 그에게 택주를 빼앗도록 하고, 자신은 택주를 지키기 위해 출격한 명의 지원군과 한점(韓店)[* 현재의 산시성 [[창즈시]](長治市) 한디안진(韓店鎭)]에서 격돌하여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이는 명과의 전투에서 거둔 북원의 첫 승리였고, 승전에 고무된 혜종은 코케테무르에게 대도를 공격하여 되찾을 것을 명령한다. 코케테무르는 안문(雁門)[* 현재의 산시성 [[숴저우시]](朔州市) 유위현(右玉縣)]에서 출격하여 [[거용관]]을 탈취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서 대도를 공격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서달이 대도를 지키러 오는 대신에 태원을 공격해오자 코케테무르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서달의 공격에 매우 당황하여 보안주(保安州)에 이르자마자 황급히 군대를 되돌려 태원을 지키기 위해 급히 회군하였다. 그러나 코케테무르는 회군하기 무섭게 서달에게 갑작스러운 야습을 당하게 되어 크게 낭패하였고, 결국 [[간쑤성|감숙]](甘肅)을 향해 달아난다[* 이때 서달의 선봉장으로서 야습을 주도했던 [[상우춘]]의 열전에 따르면 코케테무르는 이 싸움에서 겨우 호위기병 18기(騎)만을 이끌고 달아났는데, 급박하게 도망치느라 군화 한짝을 잃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이때 코케테무르는 그의 오랜 본거지였던 태원은 물론이고 그 성에 남아있었던 4만여 명의 병사들도 모조리 잃게 되어서 산서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태원의 상실은 뼈아픈 패배였지만, [[닝샤 후이족 자치구|영하]](寧夏)로 달아난 코케테무르는 감숙 지역으로 진출하여 그곳에서 패잔병들과 귀족 세력의 군대, 그리고 차칸테무르의 옛 부하들을 규합하여 대군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원의 잔여 세력들을 결집하여 [[권토중래]]한 그는 1369년 5월에 장량신(張良臣)[* 코케테무르의 주적 중 한 명이었던 장량필의 동생이다.]이 서달에 대항하여 그의 본거지인 [[칭양시|경양]](慶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 일이 있기 전에 장량필은 섬서로 진격해오는 서달을 피해서 그의 세력을 장량신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몸만 빼내서 달아나다가 코케테무르에게 붙잡혔었다. 형이 코케테무르에게 억류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장량신은 처음에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서달에게 항복하였지만, 코케테무르는 오히려 장량필을 죽이지 않고 그의 안위를 보장해주면서 장량신을 포섭하려 하였다. 이에 코케테무르의 지원을 믿게 된 장량신은 결국 코케테무르가 의도한 대로 서달을 배신하고 기습적으로 명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한찰아를 파견하여 원주(原州)[* 현재의 [[간쑤성]](甘肅省) [[칭양시]](慶陽市) 전위안현(鎭原縣)], 경주(涇州)[* 현재의 간쑤성 [[핑량시]](平凉市) 징촨현(涇川縣)]를 무너뜨리고 장량신의 후방을 지원하면서 명의 수비군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결국 8월에 장량신이 서달에게 토벌당하여 결과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는데, 코케테무르는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다가 서달이 [[난징시|남경]](南京)으로 회군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자 연말에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란저우시|난주]](蘭州)를 공격한다. 처음에는 코케테무르에게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갔다. 난주성은 코케테무르의 지휘 아래 북원군에 철저히 포위되어 외부와 고립되었으며, 음력 12월 13일[* 양력으로는 1370년 1월 11일]에는 코케테무르가 난주를 구원하기 위해 출격한 명의 장수 우광(于光)과 마난탄(馬蘭灘)에서 격돌하여 그 군대를 쳐부수고 우광을 죽였다. 그러나 난주의 수비장 장온(張溫)이 성을 철통사수하는 바람에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공격해도 난주성을 무너뜨리지는 못했고, 코케테무르를 주시하고 있던 서달이 토벌군을 이끌고 [[시안시|서안]](西安)에서 나와 난주로 진격해오자 코케테무르는 어쩔 수 없이 난주의 포위를 풀고 물러났는데[* 여담으로 서달이 올때까지 코케테무르의 공격을 잘 막아낸 장온은 그 공적으로 [[후작]]의 작위를 받고 명의 개국공신이 된다.], 코케테무르는 침아욕(沈兒峪)[* 지금의 간쑤성 [[딩시시]](定西市) 안딩구(安定區) 일대에 있는 협곡이다. 여담으로 침아욕은 '아이가 물에 빠지는 골짜기'라는 뜻이지만 현재는 물길을 찾아볼 수 없다.]에 이르러 서달의 명군과 조우하게 되었다. 코케테무르와 서달은 보루를 사이에 두고 격렬하게 싸웠지만 코케테무르 쪽에서 별다른 이득을 보지 못했다. 서달이 그의 부장 등유(鄧愈)를 보내서 코케테무르를 견제하게 하였는데, 등유가 코케테무르의 군대를 공격하여 북원군 2천여 명을 참수하는 등 양군 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서달의 진영을 살핀 코케테무르는 부장 엄봉선(嚴奉先)에게 1천의 기병을 내주고 방비가 허술해보이는 서달의 동남쪽 진영을 불시에 야습하게 했는데, 이 작전은 효과를 거두어 그곳을 지키던 명군이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서달이 재빨리 혼란을 수습하는 바람에 야습은 헛수고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군대를 정비한 서달은 날이 밝자 대대적으로 반격하여 코케테무르의 본진으로 돌격해 들어왔다. 코케테무르가 그 기세에 눌려 서달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니 서달은 군대를 이끌고 그대로 짓쳐들어왔고, 코케테무르의 본진은 완전히 뭉개져버렸다. 이 싸움으로 코케테무르가 감숙에서 끌어모았던 대군은 '''말 그대로 전멸'''[* 《명사》에 수록된 서달의 열전에 따르면 이 싸움에서 서달이 '''포로로 잡은 장교와 병사들만 84,500명'''에 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사자까지 포함하면 10만 명은 족히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정도면 코케테무르가 거느리고 있던 모든 병력을 잃은 수준이다.]당했다. '''침아욕 대전'''에서 당한 참패는 태원에서의 패배보다 막심했는데, 엄봉선이나 한찰아 등 싸움을 잘하던 부장들을 모조리 잃었을 뿐만 아니라 코케테무르의 호위병들조차 단 한 명도 남지 못했다.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진 코케테무르는 달랑 처자식만 낀 채로 영하를 향하여 달아났다. 그를 따르는 병사조차 단 한 명도 남지 않았기에 일신의 무용에 의지하여 추격자들로부터 자신과 처자식의 목숨을 지켜냈던 코케테무르는 영하에서 [[황하|길을 막는 큰 강]]을 맞딱드렸는데, [[생존왕|이에 절망하지 않고 아내와 함께 뗏목과 노를 만들어서 기어이 강을 건너]] 최종 목적지인 [[카라코룸]][* 한자로는 '합랄화림'(哈剌和林)으로 표기되며, '화림'이라는 약칭으로도 많이 쓰인다.]으로 처절하게 달아났다. 이번의 대패로 인해 코케테무르는 중국 내륙에 남아서 명과 싸우던 옛 부하들과 지지자들을 모조리 잃게 되었으며, 중국 내륙에서의 영향력도 완전히 상실하게 되어서 이후 3년 동안 중국 내륙으로 한발짝도 들이지 못하게 된다. 코케테무르가 북쪽으로 도망친 황제를 찾아 카라코룸에 도착했을 때, 기존의 황제였던 [[혜종(원)|혜종]]은 이미 죽고 없었으며, 황태자가 뒤를 이어 [[소종(원)|새 황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명군의 공격을 피해서 새 황제를 따라 달아난 옛 관리들은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한 북원 정권의 주요 구성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황태자의 신분에서 벗어나 새로 황제가 된 소종은 황태자 시절에 사사로이 품었던 원한을 잊고 코케테무르를 승상으로 삼아서 병권은 물론이고 국정까지 맡기는 등 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였다. --[[트롤링]]을 하다가 지쳤나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