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트디부아르 (문단 편집) == 역사 == [[1890년대]]에 [[서아프리카]] 국가([[세네갈]], [[기니]], [[가봉]])처럼 [[프랑스]]의 [[식민지|식민지배]]를 받았는데 당시에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일부였다. 그리고 [[프랑스]]의 문명화 정책으로 인해 공용어는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1960년]], 식민지배는 종지부를 찍었고 이후에 정치적 [[막장]] 가도를 달리기는 해도([[펠릭스 우푸에부아니]]의 [[독재]]) 경제적으로 농산물 수출과 원자재값 상승으로 1960~1978년의 황금기에는 8.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는데 이 때의 경제성장률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한창 경제발전이 절정이었을때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남아공]], [[나이지리아]], [[콩고민주공화국]]에 이어 네번째로 경제규모가 큰 경제대국으로 등극했을 정도였다'''.[* 1인당 GDP는 [[가봉]] 같이 더 높은 나라도 몇몇 있었지만 이들 나라들은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경제력은 코트디부아르가 더 컸다.] 그래서 한 동안 코트디부아르는 ‘평화의 섬’, ‘경제 기적’, ‘불어권의 맏형’으로 불렸으며 독립 이후 20년간은 카카오와 커피 등 열대작물을 수출하면서 식민지에서 벗어난 대표적 모범국가로 성장했다. 이 당시 [[아비장]]은 고도경제성장에 따라 여러 고층건물들이 속속 들어서서 화려한 모습을 뽐냈기에 서아프리카의 파리라는 별칭이 붙여졌고, 내전기간 중에 인프라 상당수가 파괴되었기는 했지만 기초적인 인프라는 갖춰져 있었다. 현재도 코트디부아르의 인프라 수준은 타 아프리카 국가에 비해서 낫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래서 현지인 가운데서 코트디부아르가 계속 안정적으로 성장했었으면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잘살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절정기 당시 코트디부아르의 1인당 GDP는 약 1,200불 이상이었는데, 이는 대한민국의 1,700불과 비슷한 수준이다. 물론 작물 재배로는 한계가 있었을테니 실제로는 오늘날 말레이시아 정도의 10,000~15,000불 사이였다.] 그 덕에 이웃 가난한 나라에서 부러움을 많이 받았으며 주변국에서 일하러 온 노동자들이 워낙 많았고, 당시 코트디부아르 당국에서도 종족갈등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외국인들을 받아들였으며 현재도 코트디부아르 인구의 25% 가량이 주변국에서 온 이주민 계통이라는 통계가 나올 정도다. 이 당시를 살았던 코트디부아르인 노년층들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는 각종 먹을거리들이 넘쳐나서 영양실조는 주변국에서나 볼수있는 일이었고 시골 곳곳에 까지 인프라공사가 활발히 진행되던 시절이었다. 허나 경제의 핵심부문을 여전히 프랑스에게 상당부분 의존하는 등 기초체력이 그리 탄탄치 못했기 때문에 1978년부터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고, 석유값이 폭등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세수가 급감하는 바람에 경기침체를 겪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서 농산물 가격이 높게 유지될 것이라고 낙관하면서 농산물 수출로 벌어들인 돈으로 산업화를 진행하겠다고 외국으로부터 막대한 돈을 꾸면서까지 투자한 상태였는데 산업화가 생각보다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아 결국 그 돈이 부채로 되돌아오고 말았고, 이렇게 경제가 침체되어가던 와중에 1973년 당시 OPEC의 전략을 따라해서 카카오 가격을 올릴려고 했지만 가격통제에 실패하여 결국 초콜릿회사들에게 굴복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또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나가자 외국기업들이 코트디부아르에서 철수해서 대규모의 자본유출까지 일어났다. 그렇게 각종 지표가 마이너스를 향해 달려갔고 결국 1987년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국가파산을 선언하고야 말았고, 코트디부아르의 기적은 말 그대로 신기루가 되었다. 이로 인해 [[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며 농촌에 지급되었던 보조금은 없어지고 보건소에 다녀올려면 돈을 내야되게 바뀌어 버렸다. 국영기업 역시 대다수가 민영화되어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실시되고 외국회사에게 헐값에 팔려나간 것은 덤이었으며 한때 아프리카에서 상위권이었던 1인당 국민소득은 내려앉는 등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경기침체가 장기화되어 을씨년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어가면서 분노가 헐값으로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향했고 이로 인해 1980년대 후반 외국인 추방 움직임이 벌어졌는데 이게 폭동으로 번져 많은 외국인들이 구타 및 살해당했다. 대다수가 불법 노동자라서 지금까지도 정확한 사망자 및 피해자 인적사항을 모른다. 그래서 [[차드]]라든지 여러 이웃 나라에서는 코트디부아르로 일하러 갔다가 이때 '''영원히 소식이 끊긴''' 사람이 꽤 된다고 한다. 덕분에 이들 나라에 가면 부모를 그 때 잃은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33년동안 권력을 차지한 [[펠릭스 우푸에부아니]]가 [[1993년]] 사망하자. 이후 그의 후임으로 [[앙리 코낭 베디에]]가 권력을 차지했다. 그러나 혼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999년]] 투오 포지에가 이끄는 부대가 [[1999년 코트디부아르 쿠데타|쿠데타]]를 일으켰고 [[로베르 게이]]가 군부의 지지를 얻으며 대통령이된다. 이로 인해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의 후임인 앙리 베디에는 프랑스로 도망가기에 이른다. 그러나 2000년, 로베르 게이와 로랑 그바그보의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이틀 후, 지역별 득표 현황을 발표하는 중 로베르 게이를 추종하는 군인들이 발표를 중단시키고 로베르 게이가 당선자라고 발표했다(지금도 코트디부아르는 대선 결과 발표가 한국처럼 당일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3일동안 민중봉기가 일어나 로베르 게이 장군이 쫓겨나고 그바그보 대통령이 취임했다. 이어 2002년, 대통령 자리를 두고 [[2000년]]에 취임한 [[로랑 그바그보]](Laurent Gbagbo)와 로베르 게이 (Robert Guéï)의 군사반란([[쿠데타]]) 및 [[제1차 코트디부아르 내전|내전]]이 벌어져 정부군과 반군간의 치열한 싸움이 펼쳐졌다. 결국 반란군이 패하여 로베르 게이는 사살당하고 4년이나 시체가 영안실에 처박혀있다가 나중에 장례를 치루게 된다. [[파일:/image/038/2007/07/17/news1200707172100180.jpg]] 물론 내전이 끝난 상황이 아니여서 반군과 정부군의 교전은 계속되었고 국토를 정부와 반군이 나누고 있는 코트디부아르에서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가 양측의 전쟁 자금원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게 엄청난 수준의 자금으로 코트디부아르 정부와 반군이 2004년 이후 카카오로 거둔 이익은 각각 5,800만달러와 3,000만달러에 달했을 정도로 엄청났다. 현재까지도 전 세계 카카오 생산량의 약 40%를 차지하는 코트디부아르는 2006년 카카오 수출로 10억달러의 이익을 얻었는데, [[카카오]] 생산과정에서 벌어지는 인권 유린이 크게 문제가 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12~14세의 어린이 28만여명이 카카오 농장에서 인신매매와 혹사,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코트디부아르 정부와 반군을 비판했으며, 코트디부아르 야당은 정부와 반군이 카카오 뿐 아니라 [[커피]]와 목화, 원유 등을 통해서도 자금을 끌어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에라리온]]에서 수출되는 다이아몬드처럼 카카오 수출에 제재조치를 취하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는 주장, 좀 더 구체적으로, 코트디부아르 지역전문가인 대니얼 배린트 쿠르티는 “카카오 생산 근로자 300만~400만명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해서 카카오 제제조치를 취하기도 뭐한 상황이 되었다. [[2005년]]엔 코트디부아르 최초로 [[FIFA 월드컵|월드컵]][*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2006 FIFA 월드컵 독일|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을 자축하고 있던 도중 [[디디에 드록바]]가 자신에게 다가온 중계방송사의 카메라 앞에 무릎을 꿇은 후 '''"여러분, 우리 모두 서로를 용서하고 무기를 내려놓읍시다."라고 호소했다'''.[[https://youtu.be/KAW7DF1Ufek|#]] 이런 드록바의 호소 이후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일주일 동안 총성이 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2007년]] 협정(와가두구 평화합의)을 통해서 2007년 7월 내전을 종식시켰다.[* 물론 이것이 드록바 혼자의 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드록바의 호소가 국제적인 관심을 끌고 코트디부아르 내에서도 내전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다만 아직 반군의 무장해제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닌 상태였으며, 여전히 국토의 절반을 차지하는 북부지역에 대해서는 정부가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특히 2002년 내전 이후 코트디부아르 북부를 장악하고 있는 포스누벨은 처음엔 주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지만 폭력, 재산갈취, 부패 등으로 지금은 주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보복을 우려해서 얼굴을 가리고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포스누벨의 행패를 증언했는데 다음과 같은 증언이 나왔다. >"형의 시체가 시장 뒤편에서 발견됐는데 왼쪽과 오른쪽 다리에 총 자국이 있었다. 강제로 포스누벨에 가입시키기 위해 총을 쐈는데 마지막에는 머리를 쏴 죽였다. 이 땅에는 정의라는 것이 없다." >"처음엔 주민들을 위해 일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무조건 자신들의 지시를 따르라고 협박하고 있다. 그들은 돈과 보석을 빼앗아 간다." >"돈이 없다고 하니까 부인과 딸을 강간하고 나를 폭행했다." 그래도 내전이 일어나는 때보다는 상황이 좋아졌고 2007년 이래 2012년까지 코트디부아르에는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임명한 최영진 전 '''외교[[차관]]'''이 코트디부아르 담당 [[유엔]]사무총장 특별대표로서 현지에서 '''[[UN 평화유지군]] 11,000명을 지휘'''했다. [[https://www.mofa.go.kr/www/brd/m_4080/view.do?seq=305078&srchFr=&srchTo=&srchWord=&srchTp=&multi_itm_seq=0&itm_seq_1=0&itm_seq_2=0&company_cd=&company_nm=&page=1152|#]] 이후 박근혜 정부 취임과 함께 주미대사로 발령. 한편 코트디부아르의 [[로랑 그바그보]] 대통령의 임기가 종료된 2005년 10월 이후 몇차례나 대선 투표를 실시하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정국의 불안과 준비 부족 등을 이유로 연기되어서 점점 독재의 싹수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좀 조용해지나 싶던 중 [[2010년]] 12월, [[로랑 그바그보]] 대통령이 2010년에 치러진 대선에서 공화당의 후보이자 북부 반군인 포스누벨과 북부의 무슬림 세력들의 지지를 받는 와타라 후보가 54.1%의 표를 얻어 45.9% 득표에 그친 [[로랑 그바그보]] 대통령을 제치고 대선에 승리했다고 발표해서 이제 정권 교체를 하나 싶었지만, [[로랑 그바그보]]는 코트디부아르 대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선거결과에 불복하고 대통령 취임을 선언하는 막장 짓을 저질렀고 선거에서 승리한 와타라 전 총리도 대통령 취임을 선언해 [[2019년 베네수엘라 정치 위기|한 나라에 두 대통령 취임]]이라는 사태가 벌어져 다시 [[제2차 코트디부아르 내전|내전]]의 암운이 드리워졌다. 코트디부아르 보안군은 수도 아비장 교외의 야당 사무실에서 최소 4명 이상을 사살했다고 주장했으며, 로랑 그바그보 대통령 지지자들도 와타라 후보 주도 반군의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정부군은 2010년 12월 2일 오후 8시부터 국경을 무기한 전면 봉쇄하고 인적, 물적 교류를 차단했다. 또 프랑스 등 외국 언론사의 TV와 라디오, 뉴스 송출도 차단했다. 2010년 10월 말에 이미 1차 대선 투표가 진행됐지만 이 역시 폭력사태로 얼룩지면서 그동안 다수의 사망자를 냈었기 때문에 내전은 이미 일어날 기미가 있었던 상황이기는 했다. 결국 코트디부아르에서 다시 준내전 사태가 일어나, 수백 명의 용병 부대가 돈을 받고 들어와 전투를 벌이고 있다. 게다가 양측 다 내전 와중에서 서로 학살을 벌이고 있어서 국제사회가 누구 손을 들어주기도 뭐한 상황이 되었다.[[https://www.yna.co.kr/view/AKR20110411095800009|기사]][* 전쟁 당사자들이 서로 학살을 저지르는 상황은 [[시리아 내전]], [[유고슬라비아 내전]], 남수단 내전, 앙골라 내전, 콩고 전쟁, [[우크라이나 내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을 비롯한 중동-아프리카, 동유럽 지역 분쟁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다.] [[파일:/image/038/2011/04/03/alba01201104032323130.jpg]] 특히 이 내전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코트디부아르 서부도시 두에쿠에에서 최대 1,000명의 사람들이 학살된 사건이 가장 유명하다.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외신들은 가톨릭구호단체 카리타스가 전했던 말을 전했는데 2011년 3월 30일 두에쿠에에서 총에 맞거나 칼로 토막난 시신 수백구를 발견했다고 밝힌 내용을 보도했는데, 카리타스의 패트릭 니콜슨 대변인은 "3월 27~29일 전투 결과 도시 전체가 시체로 가득 찼다. 직원들이 도시와 덤불, 공동묘지에서 시체를 목격했다"며 사망자수가 1,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도로테아 그리밋사스 대변인도 "수많은 시체에 충격을 받았다. 적어도 시체 800구가 있었다"고 말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8&aid=0002139964|기사]] 한편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도시로 꼽히는 아비장에서는 이 날도 대통령궁과 군사기지 등지에서 대포와 기관총을 쏘며 양측이 격렬한 전투를 벌여댔다고 하며, 유엔은 아비장에 있는 직원 200명을 모두 피신시켰다. 전황은 계속 그바그보에게 불리해져갔다. 결국 [[2011년]] 4월 초, 수세에 몰린 코트디부아르 전 대통령인 [[로랑 그바그보]]는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항복의 뜻을 밝혔으나 돌연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종적을 감춰버렸고]], 다시 UN군을 공격했다. 이에 UN군은 [[프랑스군]] [[헬리콥터]]와 연합해 다시 그바그보 세력을 공격했다. 이 공격은 성공해서 4월 11일, 前 대통령인 그바그보가 [[프랑스]] [[특수부대]]에 생포되면서 일단 선거에서 승리했던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가 정식 대통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선 이후 이미 100만명이 집을 버렸고 13만명 이상이 [[라이베리아]] 국경을 넘어갔다고 하니, 사후 처리가 더 문제일 듯. 또한 [[기독교]]계였던 [[로랑 그바그보]]를 축출한 와타라가 [[이슬람]]계이기 때문에 [[기독교]]계에 심각한 탄압과 학살을 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고 이미 내전 중에 와타라측 군인들이 [[기독교]]계 주민들을 학살한 혐의도 있다. [[파일:/image/421/2015/10/28/1612966_article_99_20151028151704.jpg]] [[알라산 와타라]] 현 코트디부아르 대통령 한편 내전에서 승리한 [[알라산 와타라]] 대통령은 내전으로 작살난 경제를 회복시키는데 성공한 수준을 넘어서 상당한 고도성장을 기록했기에 [[2015년]] [[10월 25일]]에 코트디부아르 대선에서 와타라 대통령이 약 84% 지지를 확보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매우 우려했던 폭력사태나 투표 방해행위 없이 평화롭고 공정하게 진행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와타라도 코트디부아르 내전에서 상당히 많은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지라 국제인권단체들은 현 코트디부아르 정부와 와타라 대통령을 전범 혐의로 조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2020년 7월 8일에 코트디부아르의 아마두 쿨리발리 총리가 사망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4&oid=421&aid=0004743590|#]] 7월 30일에 신임 총리로 국방장관인 하메드 바카요코가 임명됐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4&oid=001&aid=0011782340|#]] 코트디부아르에서 알리산 와타라 대통령의 3선 출마를 두고 시위가 발생했고, 찬반 시위대가 충돌해 최소 4명이 사망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4&oid=001&aid=0011814003|#]] 와타라 대통령 3선 이후 야당 지도자들을 소요·테러리즘 등 혐의로 수사하고 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998990?sid=104|#]] 아비장에서 10대 여성이 에볼라에 감염되자 백신 접종을 시작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2D&mid=shm&sid1=104&sid2=234&oid=001&aid=0012604678|#]] 2022년 4월 13일에 파트릭 아치 총리가 자신과 내각의 총사퇴서를 제출했다고 [[알라산 와타라]] 대통령이 밝혔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2D&mid=shm&sid1=104&sid2=234&oid=001&aid=0013112400|#]] 그러나 며칠 뒤 내각 개편과 함께 파트릭 아치 총리는 다시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