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콩나물 (문단 편집) == 한국사의 콩나물 == 한국에서 최초 재배는 삼국시대 말이나 고려 시대 초기로 추정되며 이는 기록상 세계 [[최초]]이다. 935년 [[고려]] [[태조(고려)|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태광태사 [[배현경]]이 식량 부족으로 인하여 굶주림에 허덕이던 군사들에게 콩을 냇물에 담가 콩나물을 불려 먹게 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콩나물은 그야말로 물만 주면 양이 늘어나는 기적의 식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고려 시대 사람들도 콩나물이 물 먹기 전의 콩에 비해 수분만 늘어나고 실질적인 양분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도 부피가 늘어나 포만감이 늘어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래서 이후로도 구황작물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고려 [[고종(고려)|고종]] 때에 저술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서이다.]에서는 콩나물이 대두황(大豆黃)으로서 등장하는데, 여기서 콩나물은 보전성을 높이기 위하여 콩을 싹트게 한 뒤 햇볕에 말린 것으로, 이것을 당장에 먹을 식품으로 사용할 경우에는 콩나물을 햇볕에 말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을 것이나, 구체적인 조리법은 알 수 없다. 조선시대의 조리서인 시의방(是議方)에는 콩나물을 볶는 요리법이 기록되어 있고,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콩나물을 황두아(黃豆芽)라고 일컫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콩나물은 태채라고 불리며 신하들이 먹기도 했는데, [[영조]] 때 조태채라는 신하가 득세하자 그를 싫어하던 신하들이 태채는 머리가 없어야 제맛이라면서 일제히 콩나물의 머리를 떼어내고 뿌리만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이는 야사일 뿐이다. 조태채는 영조에 앞서 왕이 되었던 [[경종(조선)|경종]] 때 [[신임사화]]로 인하여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특히 [[태평양 전쟁]]의 낙도 전투들에서 일본군이 콩나물을 길러먹으며 생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땅굴에 잠복하면서 콩나물을 길러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현재 진행형이라서 사정이 나쁜 부대에서는 부업으로 콩나물이라도 길러서 그걸 장마당에 팔아치우고 남는것은 군대식사로 쓰기도 한다. 물론 그것보다는 무를 주로 먹기는 한다. 한국군에게도 콩나물은 군대의 급양이 형편없던 1960~70년대 무와 함께 [[짬밥]]으로 자주 올라오던 부식이었다. [[가성비|가격 대비 영양 효율]]이 이만한 게 또 없기 때문이다. 당시의 충격과 공포의 콩나물 메뉴에 관한 이야기는 해당 문서로. 식재료 가격이 비싼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저렴한 식재료 중 하나이다. 애당초에 콩에 싹이 나도록 키우는 방식의 채소여서 비료나 넓은 경작지가 필요 없다. 원료가 되는 콩(대두)은 과거에는 경작을 해서 콩나물을 생산했으나, 1990년대 이후에는 미국, 중국, 남미 등지에서 대량으로 콩을 수입해와서 콩나물을 생산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