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콩키스타도르 (문단 편집) === [[철(원소)|철]]제 [[무기]]와 무술 === [[파일:external/www-tc.pbs.org/battle_image.jpg]] 어쩌면 화약이나 말보다도 더 강하고 실용적이었던 무기는 바로 '''철제 창칼과 갑옷'''이었다.[* 어찌 보면, 한국사의 [[임진왜란]]에서 일본의 [[조총]]이 워낙 깊은 충격을 남기긴 했지만 실상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차곡차곡 쌓아온 실전 경험과 무술, 전술에서 더 강한 위력이 나왔던 것과 아주 비슷하다. 원주민들로서는 안타깝게도, 그들과 콩키스타도르들 사이의 격차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격차와는 달리,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유럽]]에서도 고품질로 명성이 높았던 [[스페인]]의 [[강철]] [[검]]과 [[갑옷]]은 콩키스타도르의 가장 든든한 무기였다. 그 명성이 [[고대 로마]] 시대로부터 이어지는 [[톨레도]]산 검은 휘두를 때마다 원주민의 팔다리를 손쉽게 잘라냈으며, 이렇게 절단된 팔다리가 뒹구는 지옥도에 대한 공포는 아즈텍인들이 그린 기록화에서 반복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원래 유럽에선 호신용/암살용이 아닌 전투용 창검은 갑주에 부딪혀서 이가 빠지는 걸 막으려고 날을 그렇게 예리하게 세우진 않았는데, 중남미에선 어차피 원주민들이 갑주를 입지 못하니 면도칼 수준까지 날을 세울 수 있었고, 몽둥이나 돌칼밖에 없던 석기시대의 한복판에 등장한 날선 강철검은 가히 광선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네이티브 아메리칸 박물관도 철제 무기가 정복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하면서 당시 무기들을 전시하고 있다.] 여기에 콩키스타도르들은 원래 강철 갑옷을 착용하였으나, 나중에는 무겁고 덥다는 이유로 가죽이나 천으로 된 패딩형 갑옷을 갈아입기도 하였는데 그렇게 하더라도 원주민들의 무장에 대한 방어력은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에 스페인의 [[철기]]에 맞서는 원주민들은 아직도 '''[[신석기 시대]] 또는 [[동기 시대]] 수준'''의 무장에 머물러 있었다. 이들의 무기는 [[나무]]나 [[암석|돌]]이었고 방어구는 [[가죽]]이나 [[직물]]으로 된 것이었다. 전사 계급에게 최상의 무기는 [[흑요석 무기]]였는데, 이 [[흑요석]] 자체는 오늘날 외과수술용 도구에도 사용하는 예가 있을 정도로 날카로왔고 따라서 원주민들끼리의 전쟁에서는 충분히 살상력이 높은 무기였으나, [[강철]] [[갑옷]]을 입은 상대에게는 피해를 거의 주지 못했다.[* 콩키스타도르들은 흑요석 무기보다 [[투석구]]를 더 두려워했는데, 사실 투석구는 소년 목동 다윗이 전신 갑주를 입은 거구의 전사 골리앗의 머리를 깨서 쓰러뜨릴 때 썼다는 전승이 있을 만큼 구대륙에서도 유서 깊은 비대칭 무장이었다 코르테스도 투석구에 머리를 맞고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어 죽다 겨우 살아났다.] 결국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어떤 수단으로도 콩키스타도르의 강철제 무장과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도 중남미에 [[철광석]]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철(원소)|철]]은 지각 질량의 5%나 차지한다. 철광석이 없는 대륙은 없다. 심지어 남미 국가 중 하나인 브라질은 현대에 와서는 철광석 생산량으로 5위 이내에 드는 자원부국이다 멕시코, 칠레, 베네수엘라, 페루 역시 철광석이 풍부하게 매장된 편이다.] 분명히 철광석은 매장되어 있었고 금은을 채굴, 제련하여 수준 높은 금속공예를 이룩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철광석을 캐서 주물을 만들어 무기를 제작하는 기술은 익히지 못했던 것이다. 청동기를 흔하게 사용했던 원주민 문명인 [[타라스칸]](푸레페차) 왕국이 있었지만 청동기의 상용화 및 무기화에는 실패했다. 원주민들은 [[슬픔의 밤]]에서 콩키스타도르들로부터 화기와 무구를 대량으로 노획하기도 했지만, 콩키스타도르들이 사용법을 철저하게 비밀로 했기에[* 코르테스는 현지처였던 [[말린체]]에게도 화약 제조법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대포]]가 주어졌어도 사용법을 몰라 쓸 수가 없었으며, [[화약]]을 제조하는 방법도 몰랐으므로 어차피 지속적인 사용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검]]은 검술을 몰랐던 탓에 막대기에 매달아 [[창(무기)|창]]처럼 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총]]과 [[쇠뇌]] 역시 사용법을 몰라서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전술]] 개념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당시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의 [[검술]]은 오로지 적을 인정사정없이 죽이기 위한 실전 검술이었다. 특히나 대다수의 콩키스타도르들은 본국에서 700여 년 간 지속된 [[레콩키스타]]에 참여[* 게다가 이들이 상대한 적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에 비하면 제대로 조직되고 무장한 데다 콩키스타도르들만큼이나 호전적이기까지 한 베르베르 전사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을 상대해온 콩키스타도르 소속 병사들의 전쟁에서의 태도는 사납기 이를 데 없었고, 적을 향한 반인륜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해온, 단련된 최정예 용병들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전통적인 [[아즈텍 제국|아즈텍]] 군대의 전략과 전술은 적을 생포하는 것에 초점이 있었다. 전투는 반드시 상대를 죽이지 않더라도 기량의 격차를 확인하면 승패가 결정되었고, 불복하더라도 두들겨패서 기절시켜 [[포로]]로 만들었다. 이러한 전투 문화가 발달한 까닭은, 대규모의 [[인신공양]] 풍습을 가지고 있던 아즈텍 문화의 특성상, 적을 죽이는 것보다 생포하는 것이 훨씬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더 인도적인 건지, 잔인한 건지-- 게다가 인신공양이 아니더라도 [[포로]]를 생포해서 그 노동력을 이용해야 했다. 아즈텍은 유라시아와는 반대로 [[소]]나 [[말(동물)|말]]같은 대형 [[가축]]이 없었기 때문에 농사와 운송을 전적으로 인력에 의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포로를 죽이는 것보다는 투항시키는 것이 더 유리했던 것이다. 구대륙에서는 적의 군대까지 다 살려서 잡아가는 것보다는 일단 적국 군대에 유의미한 타격을 주어서 무력화시켜 민간인들을 몽땅 노예로 잡아가거나 약탈, 혹은 장기적 지배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아예 행정구역에 편입을 시켜버려서 지속적으로 세금을 내게 만드는 방식을 사용했겠지만 아즈텍인들은 '''지속적으로 노예를 빨아먹을 농장을 만든다'''는 괴상한 국가 운영을 했다. 이는 [[스파르타]]에서도 사용했던 방법이지만, 많은 비율의 노예가 인신공양으로 실질적인 의미없이 녹아서 없어져버리니 스파르타보다도 훨씬 노예에 쪼들리는 상태가 되고, 결국 이러한 방식의 군대까지 나오게 된 셈이다. 아즈텍 전사들은 뛰어난 운동 능력과 [[무술]]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주변국과 벌인 '꽃 전쟁'에서는 대개 승리했지만, 그들의 무술은 어디까지나 상대를 생포한다는 규칙 안에서만 효과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때까지 해왔듯이, 콩키스타도르의 급소를 노려서 죽이기보다는 완력으로 제압하거나 기절시켜서 데려가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삼았다. 이렇게 비효율적인 방식을 고집했기 때문에 아즈텍 전사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뤄야 했다. 게다가 기껏 적을 제압하더라도 후방으로 끌고 가던 와중에 다른 적들이 달려와 구출해버려서 놓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코르테스 본인도 한 전투에서 3번이나 이 일을 겪었다. 결국 아즈텍인들도 후기에는 생포를 고집하지 않고 살생을 위주로 한 전투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수백년 동안 발전한 구대륙 전쟁 기술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무엇보다도 적을 그 자리에서 살해하기보다는 생포하려는 오랜 관습을 하루아침에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기 때문에, 콩키스타도르를 잡았다가 놓치는 일은 계속해서 일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