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콩키스타도르 (문단 편집) === 병력과 [[외교]] === 비록 콩키스타도르의 무장이 압도적으로 뛰어나기는 했지만, 아즈텍 제국과 잉카 제국은 어마어마한 인구수라는, 대단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본국인 스페인의 인구 수가 700만에 불과했으며, 특히나 원정군은 수백 명, 많아봐야 1~2천 명이었다. 반면에 아메리카 원주민의 숫자는 수천만이나 되었으며, 전투 시에는 최소 수천 명, 많으면 20만으로 숫적으로 최소 수십대 1이었다.] 게다가, 원정군은 본국과의 거리가 멀어 본국의 보급과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반쯤 고립되어 싸웠다. 콩키스타도르의 정복이란 [[재향군인회]]나 [[민간군사기업]]이 원주민 영토로 우르르 몰려가서 깃발 꽂고 본국에 보고하는 형태였다.[* 콩키스타도르들은 정말로 민간군사기업 쪽에 더 가깝다. 이들은 무기나 장비 모두를 개인의 돈으로 사서 써야 했고, 심지어 정복을 하러 원정을 떠날 때에도 자신들이 미리 돈을 투자해야 했다. 그래서 원정이 성공하면 투자한 금액만큼 약탈한 재보를 차지할 권리가 생기는데,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한 기마병이 그만큼 약탈한 재보에서 많은 양을 차지했고 반면 보병들은 그보다 적은 금액을 받았다고 한다. 기마병은 사람보다 더 많이 먹고 관리하는데 돈이 더 들어가는 말을 돈주고 사야 했으니 자연히 투자한 돈이 더 많고 그만큼 많은 액수의 노획물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압도적인 숫자의 원주민 속에서 콩키스타도르들은 강력한 무기를 가졌음에도 항상 고전해야 했다. 코르테스의 멕시코 원정대는 [[슬픔의 밤]] 때 인구수 수십 만인 [[테노치티틀란]]에서 그들을 쫓는 수만의 분노한 군중들 속에서 추격을 뿌리쳐가며 달아났으며, 피사로의 잉카 원정대는 망코 황제가 쿠스코를 포위공격했을 때, 스페인인+동맹 부족의 도움으로 겨우 버텼다. 오히려 객관적인 시점에서 보자면 이들은 죽을 만큼 고생했다.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들은 주변 부족들과의 [[갈등]]과 [[내분]] 상황을 적절히 이용하는 영리한 정치적 술수를 썼다. (일종의 [[디바이드 앤 룰]]) [[에르난 코르테스]]는 이 전략의 일환으로 부족 족장의 딸인 [[말린체]]와 결혼하고 슬하에 득남까지 했다.[* 아버지를 에르난 코르테스로, 어머니를 말린체로 둔 이 아들은 어른이 되자, 아버지의 후광으로 스페인군 기병대 장교가 되었다. 거기다가 코르테스는 자기 자식들을 모두 아꼈기에 끊임없이 원주민 사이에서 얻은 사생아들도 정식 자식들로 인정받으려고 로비를 벌였고 몇명은 실제로 정식 자식으로 인정받았다. 덕분에 코르테스에게는 메스티소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코르테스뿐만 아니라 다른 콩키스타도르들도 원주민 여성들과 [[결혼]]하거나 첩으로 두곤했다. 그러다보니 [[중남미]]의 인구 과반수를 차지하는 [[메스티소]]들이 이때부터 탄생했다. 게다가 콩키스타도르들은 아즈텍 제국에 반기를 드는 부족, 즉 같은 적을 둔 동맹으로 회유가 가능할 법한 부족들에게 그들이 이전에 먹어보지 못한 멋진 음식을 대량으로 베풀었는데 그게 바로 [[돼지고기]]였다. 아즈텍 일대에는 대형 동물이 적었기 때문에 고기를 맛보려고 인신공양까지 감수하던 상황이었는데, 원정군이 제공한 맛도 좋고 양도 무지막지하게 많은 돼지고기를 보자, 당연히 눈이 휘둥그래질 수밖에 없었고[* 사실 아즈텍이나 잉카가 사하라 사막이나 아라비아 반도와 같은 사막 지형이었다면 별 쓸모가 없었을 것이지만 다행히도(?) 이 지역들은 돼지를 기르기엔 적합한 기후를 가지고 있었다.] 돼지고기를 먹고 싶어서라도 콩키스타도르와 친분을 맺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법은 콩키스타도르들의 정복에 어마어마한 도움을 주었다. 원주민들은 서로가 같은 민족, 공동체라는 관념이 없었다. 아즈텍도 명목상으로는 제국이라지만, 실상은 [[테노치티틀란]]이라는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텍스코코, 틀라코판의 3개 도시가 동맹을 맺어 타 부족들을 무력으로 복속시킨 형태로, 실질적으로 도시 연맹에 지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 동맹조차 중심인 테노치티틀란이 스페인인들에게 밀려 위기에 처하자, 텍스코코는 동맹이고 뭐고 내팽개치고 콩키스타도르 측에 가담할 정도로 결속력이 없었다. 게다가 복속된 나머지 부족들은 무력으로 제압된 데다가 인신공양에 막대한 공물까지 착취당했던지라 아즈텍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특히나 인간 목장 취급 당한 틀락스칼텍은 절대로 코르테스를 배신하지 않을 정도로 아즈텍을 무너뜨리기 위해 철저히 협조했다. 아즈텍이 하나의 통합된 정치 체계가 되어 맞섰다면야 콩키스타도르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즈텍에게 [[틀락스칼텍|틈만 나면 공격당해서 잡아먹히거나]] 잉카에게 강제로 복속당한 부족들은 [[노예]] 취급 당하며 그들의 압제에 시달려서[* 인신공양이나 전쟁을 안할 때는 막대한 양의 공물을 수탈했다.] 증오하고 있었기에 그들과 함께 힘을 합쳐 맞설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아즈텍과 잉카 내부도 황위 다툼으로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이다보니 단합이 더욱 되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외부 세력인 콩키스타도르들이 원주민들을 있는 대로 학살하고 약탈하고 다녔다면야 남미 원주민들이 모두 뭉쳤겠지만 콩키스타도르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자신들이 살아남아 이득을 볼지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부족 간의 갈등 관계를 훌륭하게 이용할 줄 알았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아즈텍에 반기를 든 원주민들은 콩키스타도르가 어떤 능력을 지닌 사람들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이 어떤 무시무시한 도구와 기술을 가졌는지를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 무서움을 믿고 콩키스타도르에게 협력했다. 잉카에서도 잉카 제국에 강제로 복속된 부족들이 콩키스타도르와 협력하였다. 피사로 형제와 알마그로가 도착한 시점에 병으로 급사한 [[우아이나 카팍]]의 아들들인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가 벌인 내전[* 내전은 아타왈파의 승리로 끝났고, 아타우알파는 우아스카르의 혈족 및 추종자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였다. 이 때 도망쳐서 숨어지내던 다른 형제인 망코 잉카는 스페인의 괴뢰황제로 옹립된다.]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민심이 흉흉한 정세와, 안데스 산지를 막 평정한 잉카[* [[파차쿠티]]가 즉위한 1438년부터 아타우알파가 죽은 1533년까지 5대 95년이며, 잉카가 영토 굳히기를 시작할 시점에 역병이 퍼지고 스페인의 침략을 받았다.]에 복속된 부족들의 불만을 이용했다. 잉카는 아즈텍보단 오래 버텼으나, 망코 잉카가 일으킨 대규모 봉기가 실패한 이후로는 [[빌카밤바]]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연명해야 했다. 물론 콩키스타도르들이 항상 신사적으로 나온 것은 아니라서 경우에 따라 협박을 쓰기도 했다. 특히, 원주민 마을을 침략해서 여성과 아이들을 전부 인질로 잡고는 원주민 남성들에게 '우리 말 안 듣거나 길 안내 안 해주면 얘네들 다 죽일 거야'라고 협박하는 방식을 많이 썼다. 이에 일부 원주민들은 당하고만 있지 않고 거짓말로 속여서 엉뚱한 곳을 소개해 그들을 지치게 하거나 돈낭비를 하도록 만들었다. 원주민이 정말 길을 제대로 몰라서 헤맨 경우도 있었지만.[* 일례로 코르테스는 부하 크리스토발 데 올리드(Cristobal de Olid)가 [[멕시코]] 남부 온두라스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3천의 원정대를 조직했으나, 원주민 안내자들이 길을 모르는 바람에 코르테스의 원정대는 6개월 동안 밀림지역을 헤메고 [[말라리아]]와 풍토병을 앓아야 하는 생고생을 했다. 그러다 원정대가 겨우 길을 찾아 도착했을때 반란을 일으킨 올리드는 이미 살해당해 있었고 반란군도 항복하는 바람에, 코르테스는 결국 엄청난 재산만 탕진하게 되었다. 그래서 무혈진압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더 심하게는 매복하여 콩키스타도르들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콩키스타도르 역시 바보가 아니라서 딴맘먹는 원주민들의 속셈을 곧잘 눈치챘고, 속을 때마다 본보기로 속인 원주민들을 공개처형하거나 군견밥으로 던져주어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반항 의지를 꺾었다. 게다가 매복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면 나중에 군대를 조직하여 해당 마을을 철저하게 아작냈다.[* 일례로 에르난도 데 소토(Hernando de Soto)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아타하치 부족에게 속아서 그들의 매복으로 피해를 입자 후일 군대를 이끌고 와서 아타하치 부족민 11,000명을 전부 학살하고 그들의 거주지 모빌라를 콩가루로 만들어 아타하치 부족 자체를 멸망시켜 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