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르드족 (문단 편집) === 차별과 갈등, 학살 === 중동과 러시아,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신의 국가가 없는 거대민족이라는 점 때문에, 강대국의 이익과 쿠르드족의 독립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반목하였다. 쿠르드족은 지난 100년간 적어도 8차례 강대국을 돕거나 반목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립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영국]]을 믿고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으나 결국 [[튀르키예 독립전쟁]]의 결과인 [[로잔 조약]]으로 뒤통수를 맞고 뿔뿔이 분단됐다. 1972년 [[냉전]] 시절 친미국가인 이란과 친소국가인 이라크 간 국경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이라크 내 쿠르드인을 실컷 이용하고 막상 분쟁이 종료되자 철저히 외면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이란 견제를 위하여 쿠르드인 일부 단체와 교섭을 했으나 이걸 알아차린 이란 정부가 아주 끔찍하리만큼 이들 단체를 뭉개버렸다.[* 이 당시 쿠르드인을 공개 총살하던 사진이 [[퓰리처상]]까지 받았던 바 있다. 촬영자는 이름도, 정체도 철저하게 숨겼는데 26년이나 지난 2006년 이란인 자한지르 라즈미로 밝혀졌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33836|#]] 이스라엘은 이란 쿠르드인들에게 이렇게 하곤, 되려 튀르키예 쿠르드인들을 뭉갤 때는 튀르키예를 도왔다. 저항조직 PPK 리더 외잘란 체포에도 [[모사드]]가 정보를 제공했다는 게 정설일 지경. [[아르메니아]]로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이다. 아르메니아에선 쿠르드인은 1만 명도 안 되는 소수 민족이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문서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아르메니아로선 주변 나라들과 복잡한 상황이라서 쿠르드인들 박대하다간 고달파진다. 게다가 튀르키예 견제에 이들을 쓰자는 의견도 있고 [[제1차 세계 대전|1차대전]] 이후로 튀르키예군, 전 [[오스만 제국]]군에게 학살당할 당시 쿠르드인들이 오스만 제국군과 같이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끼어든 가해자임과 동시에 이들도 당시 같이 학살당한 피해자이기에 과거사를 따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튀르키예에선 언어가 금지되고, 심지어 쿠르드 고유 이름을 짓는 것조차 금지되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웃기게도 그런 이름들 중 몇몇은 튀르키예인들도 흔하게 쓰던 이름이라서 이 문제로 야당까지도 비꼰 적까지 있다. 그럼에도 이 조치는 1990년대까지 계속 이뤄져 왔다. 또한 1990년 초반, 동부 디야르바크르(Diyarbakır) 부근에서 튀르키예어를 모르던 쿠르드인 노인 유목민이 튀르키예군에게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 하나로 총살당하던 일도 벌어졌다. 실제로 동부쪽은 튀르키예인보단 쿠르드인들이 더 많고 이들은 시골 생활을 하면서 튀르키예어를 모르는 경우가 수두룩함에도 그런 유목민 노인을 다짜고짜 쏴죽인 일이었기에 튀르키예 군부에서도 우려했다. 게다가 디야르바크르는 쿠르드인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쿠르드 인구가 많은 곳이다. 이 도시 이름조차도 [[쿠르드어]]로 '도시'를 뜻하는 diyar와 '구리'를 뜻하는 [[튀르키예어]] bakır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오스만어]]: diyâr-ı bakır). 고대 시대부터 질 좋은 구리가 생산되면서 구리세공업으로 유명했기 때문[* 이 명칭의 유래에는 다른 설명도 있는데, 이미 [[이슬람 제국]] 시기부터 이 지역 일대가 [[아랍어]]로 '바크르의 땅'이라는 뜻의 '디야르 바크르(Diyār Bakr)'라고 불린 바 있다. 바크르는 이 지역의 주요 부족이었던 바누 바크르에서 따 온 말이다. 1937년 [[아타튀르크]]는 이 도시를 방문해서는 도시 명칭 유래가 애매하다고 하여 튀르키예어로 '구리의 땅'을 뜻하는 '디야르바크르'로 명칭을 고정시켰는데, 이는 원래 튀르키예어가 아닌 지명을 튀르키예화한 대표적인 사례로도 꼽힌다.] 이 일은 튀르키예 내 좌파들과 우파 일부도 되려 이런 마구잡이 총살은 쿠르드인들만 분노하게 만들고 튀르키예의 국제적 입지만 타격을 준다고 반발했다. 결국 이런 비난 속에 가해자 군인이 8년 징역형을 살았고 직속 상관들도 강등 조치를 취했지만, 이 일로 쿠르드인들 과격파들을 응집하게 만들던 계기가 된 바 있다. 튀르키예 영화 [[욜]]에서 이런 모습이 묘사되었다. 이렇게 일반적인 이미지는 비극의 민족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사실 쿠르드족 역시 [[아르메니아 학살]]을 주도한 전력이 있다. 이들은 학살을 주도하면서 동시에 학살당하기도 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이 저지른 [[아르메니아 학살]]이 세계적으로 논란이 될 당시 쿠르드인들은 '우리는?'이라며 분노했었다. 이 당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쿠르드인은 오랫동안 분열되면서 같은 쿠르드인들끼리 적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튀르키예 측은 당시 쿠르드인 학살에 대하여 역시 입을 다물지만, 그 피해자 수는 아르메니아인에 미치지 못할지언정 최저 몇 만에서 최대 3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기에 절대로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다만 쿠르드인들도 튀르키예를 닦달하지 못하는 게 쿠르드인 중에도 학살자가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도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당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로서도 난감한 상황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나, 튀르키예 극우들에게 살해 협박을 받아 [[프랑스]]로 가서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 가 대학교수가 되어 튀르키예 인권 운동에 나서고 있는 [[오르한 파묵]]은 [[스위스]] 언론 인터뷰에서 "오스만 제국은 100만 아르메니아인들과 13만 쿠르드인들을 학살[* 파묵은 학살자 수를 최저와 최대 주장치에서 중간치로 이야기했다.]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렇듯 당시 쿠르드인들도 배신할까 봐 덩달아 학살당했다는 주장도 실제로 많다. 더불어 이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이 반강제였다든지, 식구들이 인질로 잡혀서 오스만 제국 민병대로서 학살을 벌여야 했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 하지만 정확한 사망자가 집계조차 안 된 시리아계 기독교인 학살은 거의 묻혀졌다. 더불어 아랍인 무슬림들도 이 당시 오스만 제국에 위협이 된다고 하여 역시 상당수 학살되었음에도 묻혀졌다. 종교가 아니라 튀르크 민족주의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이들은 같은 무슬림이라도 뭉갰기 때문. 사실 쿠르드족을 튀르키예, 아랍 민족과 구분해서 보기 시작한 건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오스만 제국 후기(1875년) 인구조사를 보면, 당시 프랑스 고문관들이 인구조사를 했는데, 제국 내 민족을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무슬림]]'''으로 분류해놓고 있다. 당시 사람들에겐 무슬림이냐 아니냐가 중요했지 그들이 어떤 언어를 썼는지는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 실제로 세금부터 시작하여 일상 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무슬림이냐 아니냐가 중요했지 어느 민족이냐는 근대에 이르러서야 중시되기 시작했는데, 오스만 시대의 세금 대장인 데프테르(Defter)에 '민족'이라는 항목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민족이냐의 기준은 혈통이 아니라 모국어로 결정되었다. 당장 여기 나오는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또한 혈통이 아니라, '그리스 정교를 믿는 사람들', '아르메니아 정교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일 가능성도 크다.] 또한 쿠르드족의 근대 민족주의는 1930년대 이후 신생 튀르키예공화국이 '튀르키예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가운데 이에 대한 반발로 성장한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사실 모든 쿠르드어를 사용하는 쿠르드인들이 스스로를 '쿠르드' 정체성을 갖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쿠르드의 일파라 분류되는 자자인(Zazay, Zazalar)들은 자신들을 쿠르드와 동일하게 묶는 것을 매우 불쾌해한다.[* 다만 언어학적으로 자자인들의 언어인 자자어(Zazaki, Zazaca)는 일반적인 쿠르드인들의 언어와는 계통상 구분된다. 자자인들을 두고 쿠르드 정체성을 논하는 것은 너무 예외적인 사례를 드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계통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쿠르드'로 묶인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도 있다.] 이는 오래전부터 자자인들이 튀르키예 내에 거주하는 쿠르드계 부족 중 가장 큰 부족인 쿠르만지인(Kurmanc, Kurmançlar) 부족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해왔고 자자인들이 튀르키예 공화국에 호의적이기 때문이었다. 현재까지 튀르키예 동부에 거주하는 쿠르드들은 대다수가 부족 사회에 속해있다. 쿠르드족의 주된 생업은 목축으로 중동 외의 다른 민족과 같이 유목민으로서 생활해 왔다. [[아이유브 왕조]]의 시조인 [[살라흐 앗딘]]은 쿠르드족 출신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튀르키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중년 가수 이브라힘 타틀르세스(İbrahim Tatlıses)도 쿠르드인이다. "쿠르드인은 밉지만 이보(=이브라힘의 애칭)의 목소리는 좋다" 가 극우의 보편적인 평가인데, 이보가 쿠르드어로 부른 앨범을 내자 극우 단체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다. 이라크, 시리아 내의 [[아랍인]]들과도 사이가 무척 좋지 않다.~~제3자 입장에서 보면 아랍인들의 아랍인 우월주의가 제일 근본적인 문제이다.~~ 쿠르드인과 아랍인 사이의 관계는 북아프리카에서 [[베르베르|베르베르인]]과 아랍인과의 관계와 비슷하다. 오히려 더 심하다고 볼 수도 있는게, 심지어 이슬람에 대한 신앙심이 깊은 쿠르드인조차도 아랍인 무슬림들과 어울리는 것을 멀리하는 편이다. 아랍인 외에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상당수가 아예 쿠르드인들을 사탄의 무리, [[로자바]]는 사타니스탄이라고 부르며 극도로 증오하고 있다. 세속주의 쿠르드인 중에는 [[와하비즘]]을 믿거나 이란 신정체제에 진심으로 충성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1970년대 아흐메드 하산 알 바크르 행정부 시기 이라크에서 국제 유가가 폭등하고 전례없는 경제적 번영을 누릴 때도 쿠르드족이 다수 거주하는 북부 지역은 그 혜택에서 의도적으로 제외되었다. 실제로 현재 이라크의 쿠르드족 상당수가 오늘날에도 중세 시대 수준의 오아시스 농업이나 천수 농업에 영위하면서 농사를 짓고 사는 실정이다. 2022년 프랑스에서 한 인종차별주의자의 총격으로 쿠르드인 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이 이전에도 이민자들을 향해 공격을 해왔음이 밝혀지자 이에 격분한 쿠르드족들에 의해 파리에서 폭력 시위가 벌어진 적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