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만 (문단 편집) == 루스 공국들과의 혈투 == 쿠만의 역사는 루스 공국과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될 만큼 시작부터 끝까지 루스 공국들과의 교역과 전쟁이 빈번했다. 키예프 공국은 지형적으로 흑해에 맞닿은 [[크림반도]]와 드네프르 강의 하류를 통해 동로마 제국과 직접 교역하며 동로마의 물건들을 육로를 통해 중부 유럽으로 실어 나르고 동시에 운하와 강으로 연결되는 북해 쪽 해로로 북유럽 국가들에게 파는 중개 무역으로 번영했는데 이는 키예프 공국이 11세기 초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권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경쟁이 있듯 모든 무역의 시발점인 크림 반도로 진출하려는 흑해 북안의 유목민족들([[페체네그]] - 쿠만 등)은 키예프 공국의 경계대상 1호였다. 특히나 우크라이나의 대평원 지대는 가축을 방목하기에도 너무 적합한 환경인데다 무역로의 부는 유목민들에게도 탐스러운 이권이었다. 결국 어떻게든 무역로만은 사수하려던 키예프 공국 앞에 11세기 중반, 페체네그족을 쫓아내고 나타난 쿠만족은 그리 만만한 세력이 아니었다. 두 세력의 역사적인 첫 만남은 1055년에 --예상외로--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직은 쿠만 세력이 드네프르 강 동쪽에서 완전히 세력을 다잡지 못해서 그랬던 것으로 여겨지며 1061년, 유력한 부족장 소칼의 지휘 하에 쿠만족 군대가 키예프 남쪽의 프레야슬라프 공국을 잔혹하게 짓밟았다. 이 사건이 '''175년 동안 이어질 기나긴 전쟁의 시작이었다.''' 1068년, '''얄타 강 전투'''에서 쿠만 군대는 [[야로슬라프 1세]] 무드르이의 세 아들이 이끄는 군대를 물리쳤고, 뒤이어 대규모 물적•인적 약탈을 자행하여 이슬람 세계에 슬라브인 노예가 넘쳐나게 되었다. 쿠만인들이 어찌나 날뛰었던지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대부분 지역이 [[몽골]]의 침입에 앞서서 11세기 말에 이미 초토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1093년 5월에는 체르니코프 공이자 훗날 키예프 대공이 되는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1073~1125 재위)를 '''스투그나 강 전투'''에서 격파하여 기세를 올렸으나, 다른 루스 공국들의 지원군을 받아 지휘한 모노마흐에게 패배하여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이 혼란의 와중에 쿠만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페체네그]]족 일부와 [[오구즈]] 튀르크족 일부가 탈출하여 키예프 루스로 귀순했고, 변방 방어군이 되었다. 11세기 말에 쿠만인을 이끈 보냐크 칸(Boniak khān)은 1096, 1097, 1105, 1107년 등 수시로 [[키이우|키예프]] 원정을 나갔다. 특히 1096년에는 키예프를 점령한 이후 궁전을 불태우고, 우크라이나 중부에 이주해 정주하기도 했다. 키예프의 유명한 동굴 수도원도 이때 파괴되었다. 그 와중에 보냐크 칸은 1099년, [[헝가리]] 원정을 떠나 승리하고 왕실 보물을 약탈해 오기도 하는 여유를 부렸다. 쿠만인들의 키예프 점거는 1107년, 대공들이 이끄는 루스 연합군이 '''루브니 전투'''에서 승리할 때까지 이어졌다. 루브니 전투 이후, 쿠만은 루스 공국들과의 대결에서 한동안 밀리는 형세를 보였다.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가 키예프 대공이 되어, 분열되어 있었던 루스 공국들을 일시적으로나마 재통합한 덕분에 통일된 힘 앞에서 처참하게 밀려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모노마흐와 그의 아들이 죽자, 루스 공국들은 키예프 대공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기나긴 내전에 돌입했고, 쿠만족은 그 틈에 힘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루스 공국들을 마구잡이로 약탈하며 공세로 전환했다. 이러한 약탈은 13세기 초엽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의 약탈이 중단된 것은 루스 공국들과는 차원이 다른 [[몽골 제국]]의 침입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