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쿨리 (문단 편집) == 노예제와의 비교 == 흑인 인신매매에 기반한 노예 제도는 맞기 싫어서 대충 눈치보며 일하는 비효율적인 시스템이었고, 반면 중국계, 인도계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엄연히 '''계약노동자'''였다. 쿨리 중에서는 열심히 돈을 모아 고향에 가서 금의환향한다는 개념이 강했기 때문에 열악한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일하고 적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항해시대 흑인 노예로 운영되는 플랜테이션의 경우, 당시 서구 사회에서 영양학 개념이 부실했던 이유로 흑인 노예들에게 밥을 한두가지만 줘서 영양 불균형에 과로가 겹쳐서 아프리카에서 새로 팔려온 흑인들이 대부분 몇 년 버티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그러나 중국계와 인도계의 경우 식사를 알아서 잘 차려먹는 편으로 사망률이 비교적 낮았다. 또한 화남지방이나 인도에서 온 쿨리들은 서아프리카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열대, 아열대 지방 출신으로 더위에도 잘 버텼다. 19세기 네덜란드와 영국의 카리브해 식민지 플랜테이션에서 노예 노동 대신 쿨리를 고용하면서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는데, 그 결과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노예 인구가 많았던 브라질의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심각한 타격을 받아 재배작물을 커피로 변경하거나[* 커피는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서 재배할 수 있어서 섬 해안가의 플랜테이션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19세기 말 브라질은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국이 되었다.] 기존 북동부의 농장을 버리고 남부 [[팜파스]]로 이주하게 되었다. 북동부에 땅을 팔아버리고 남부 온대기후 초원인 [[팜파스]]에 새로 농장을 건설한 브라질 농장주들은 이웃나라 경쟁자들을 모방하여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농장을 운영하였다. 브라질로 이주한 사람들은 [[이탈리아계 브라질인|이탈리아계]], [[독일계 브라질인|독일계]], [[스페인계 브라질인|스페인계]] 혹은 [[일본계 브라질인|일본계]]로, 쿨리는 아니었지만[* 새로 개발된 팜파스는 온대기후 지역이라서 굳이 흑인 노예 노동력이나 쿨리 노동력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도 이유이다.] 임금노동자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여담으로 브라질의 농장주들은 흑인 노예들을 함부로 때리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유럽계 이주노동자들 역시 마구 구타하고 학대했는데 이 때문에 큰 마음먹고 브라질이 이민갔다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는 인구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브라질 농장의 노동환경이 열악하다는 소문이 쫙 퍼지면서 유럽에서 남미로 가는 이민자들이 20세기 초반에는 브라질보다는 아르헨티나나 우루과이로 향했다. 노예제나 쿨리 노동력 착취나 둘 다 매우 비인간적인 시스템이었으나 그나마 효율성 면에서는 쿨리 노동력이 훨씬 나았다. 비교하자면 노예제도는 채찍을 통해 노동력을 쥐어짜던 원시적인 시스템이라면 쿨리는 채무관계를 무기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좀 더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이었다. 노예제의 폐해 및 악영향은 오늘날에도 이어지는데 노예제가 불완전하게 청산된 [[아이티]]와, 인도계 쿨리 후손들이 경제를 장악하여 원주민 부족들과 갈등하는 [[피지]], 말레이시아에서 강제로 독립당한 이후 선진국 반열에 오른 [[싱가포르]] 등등의 사례를 비교해볼 수 있겠다. [[분류:인도의 역사]][[분류:인종차별/용어]][[분류:화교]] [include(틀:포크됨2, title=쿨리, d=2023-01-20 22:35:3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