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쿵더청 (문단 편집) === 초대 봉사관 === ||[[파일:공덕성결혼식.jpg]]|| || 1936년, 쿵더청의 결혼식 || 1935년 1월 18일. 국민정부는 연성공을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라는 관직으로 대체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중앙관리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직위인 특임관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쿵더청은 [[맹자]]의 종손 맹경당(孟慶棠), [[안회]]의 종손 안세용(顔世鏞), [[증자]]의 종손 증번산(曾繁山) 등과 함께 제남과 산동성부에 들러 주요 관리들과 인사한 후 난징으로 갔다. 안세용은 복성(復聖)봉사관, 증번산은 종성(宗聖)봉사관, 자사의 종손은 술성(述聖)봉사관, 맹경당은 아성(亞聖)봉사관에 봉해졌다. 3월 1일에는 공자의 남종 후손들이 남종봉사관에 임명되었다. 7월 8일, 고시원장 [[다이지타오]], [[천리푸]] 등 국민정부의 고위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쿵더청은 국부 예당에서 정식으로 봉사관에 취임했다. ||광활한 중화민족, 유교를 널리 알린다. 대동 세계, 예의로써 나라를 흥성시킨다. 명을 받아 제사를 받듦을, 대대로 끊임없이 이어나간다. 성실하게 공경하면서, 악장을 영원히 계승한다. 성인의 도리로 교화하고, 종묘를 지킬 것을 맹세한다. 선인의 유적을 본받아서, 지키면서 영원히 알린다.|| || 쿵더청의 취임선서 || 다이지타오는 쿵더청에게 "소년이 영민하고 품위있고 소박하며 조상의 미덕을 계승하여 완성하고 잘 지키어 친인들이 경축할 일이다!"라고 칭찬하며 효경 등의 여러 책을 선물로 주었다. 취임 후 쿵더청은 국민당 중앙대표 저민의와 재정부 대표 공상면과 함께 공원거리 부자묘에서 고묘 의식을 거행했다. 이후 상하이에서 쿵샹시가 주재한 환영 연회에 참가한 후 곡부로 돌아왔다. 곡부로 돌아온 후 출퇴근 시간과 각자의 역할, 근무수칙을 새로이 정하고 회계제도를 정비하여 공부를 개혁하였다. 1936년 12월 16일, 공부 후당루 건물에서 손가내(孫家鼐, 1827-1909)의 증손녀 쑨치팡(孫琪芳)과 결혼식을 올렸다. 손가내는 청나라의 학자 겸 정치가로 과거에서 장원을 차지한 사람. 한족으로는 최고의 직위라고 할 수 있는 대학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증손녀 쑨치팡과 달리 신해혁명 이전의 인물이라 한국식 독음으로 표기.) 결혼식에는 중국의 명사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장제스]] 역시 참석할 계획이었으나 4일 전 [[서안 사건]]이 발생하면서 [[장쉐량]]에게 감금당해서 참석하지 못했다. 장제스가 갇힌 줄 몰랐던 하객들은 장제스를 위해 기다렸으나 오후 2시에 72사단장 손동훤이 장제스가 참석할 수 없다고 알려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결혼식에서는 중체서용의 정신을 표방하기 위해 쿵더청은 중국식 예복을 입었으나 손가내는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결혼식도 중국식과 서양식을 섞은 형태로 치러졌다. 국민정부 주석 [[린썬]], 행정원 부원장 [[쿵샹시]], 전 대총통 [[쉬스창]], [[차오쿤]], 고시원장 [[다이지타오]], [[엽초창]],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쑹저위안]], 주중 일본대사 [[가와고에 시게루]], [[판첸 라마 9세]] 등 전 중국의 명사들이 선물을 보내왔으며 심지어 상하이의 [[청방]] 우두머리 황진룽도 선물을 보내왔다. [[중국 국민당]] 중앙당부도 국민당 명의로 예물을 보냈다. 쿵더청의 명망을 노린 [[일본 제국]]에서도 쿵더청을 포섭하기 위해 수시로 학자들이나 정치인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보냈다. 도쿄에 공묘를 건설하는 등 쿵더청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으며 1935년에는 도쿄의 공묘인 사문회가 건설된 후 쿵더청을 초청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쿵더청을 중국의 [[황제]]로 옹립해 주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하지만 쿵더청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자신을 얼굴마담으로 이용하려는 수작임을 눈치채고 초청을 거절했다. 이후로도 일본에서 집요하게 쿵더청의 방일을 요구했으나 쿵더청은 병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국민혁명군 72사단장 손동훤이 산동성 정부가 이미 황하를 건너 피했으며 장제스가 쿵더청을 내지로 피신시키라고 지시했다고 알렸다. 당시 아내 쑨치팡(孫琪芳)이 막 임신한 상태인데다가 자신이 곡부를 떠나면 제사지낼 사람이 없어서 쿵더청은 당황했지만 일본인들이게 이용당할 수는 없다고 여겨 결국 9촌 아저씨인 공영욱(孔令煜)에게 제사를 책임지게 하고 자신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우한으로 피신했다. 우한으로 가던 중 호북성에서 장녀 공유악이 태어난다. 쿵더청은 우한에서 항일선언을 발표하였으며 우한 함락 후에는 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이동했다. 충칭에서 장제스의 배려로 봉사관부를 설치하고 국민참정회에 출석하는 등 정치활동을 계속하였다. 1938년 공자 탄신일은 무척이나 성대하게 거행되었는데 장제스는 엽초창을 대표로 파견하였으며 고시원 대표 임상민, 민정청장 이수춘, 산동교육청장 하사원 등 수십명의 정부대표가 참석했다. ||[[파일:1947년공덕성일가.jpg]]|| || 1947년의 쿵더청 일가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