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쿵더청 (문단 편집) === 대만에서의 삶 === 1949년, [[국부천대]] 시에 장제스의 특별지시를 통해 스승 여금산 등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했다. 1955년, 국립대만대학 중문과와 인류학과 겸임교수로 초빙되어 교편을 잡게 되었다. 타이베이 공자묘를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만인궁장의 문패를 직접 썼다. 중화문명의 정통을 자처하는 국민정부의 안배에 따라 총통부 자문위원, 고시원장 등의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한국에도 몇차례 방문하였다. 1959년에는 서울 [[성균관]]에서 열린 [[문묘제례악|석전대제]]에 참석했으며,([[https://youtu.be/B5XMJTIyf8Y|대한뉴스 영상]])1980년에는 대한민국의 [[도산서원]]을 방문하여 퇴계 [[이황]]에게 참례를 올리고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휘호를 남겼으며 도산서원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예일 대학교]]의 연구원으로 초빙되기도 하였다. 고시원장으로 재임하던 1988년 1월 13일 [[장징궈]] [[대만 총통|총통]]이 사망하자 [[대만 부총통|부총통]] [[리덩후이]], [[행정원장]] 위궈화, 입법원장 예문아, 사법원장 린양강, 감찰원장 황존추, 장징궈의 3남 장샤오융과 함께 <경국선생유서>에 서명한 후 장징궈가 사망한 당일에 발표했다. 1989년, 장남 쿵웨이이가 만 50세에 심장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2005년 대만대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말년까지 꾸준히 중국 전통문화에 대해 강연하였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103667.html|2006년, 손자 쿵추이창이 결혼식을 올리고 증손자 쿵유런을 낳았다.]] ||[[파일:external/www.kong.org.cn/083407.jpg]]|| || 쿵더청(공덕성)[* 공자의 77대손, 의자에 앉은 사람. 마지막 연성공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쿵추이창의 조부.], [[쿵추이창]](공수장)[* 공자의 79대손, 아기를 안고 서 있는 사람. 현직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아버지인 쿵웨이이(공유익, 공자의 78대손)는 요절하여 봉사관을 맡지 못했다.], 쿵유런(공우인)[* 공자의 80대손, 쿵추이창의 품에 안긴 아기. 차기 대성지성선사봉사관.] || 2008년 대만 타이베이현에서 작고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2406325|사과 수출 문제 때문에 대만을 방문 중이었던]] [[김휘동]] 당시 안동시장이 조문하였다. [[안동시]]는 그가 생전 방문한 도산서원이 있는 등 마침 인연이 있는 지역이었다. 이후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직위는 쿵더청의 손자 [[쿵추이창]]이 잇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