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쿵더청 (문단 편집) ==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 == 대륙에 누나 쿵더마오를 비롯한 친족들이 일부 남았는데 중국 작가 위스춘의 책 '세가'에 따르면, 양안관계가 개선된 후 대륙에 잔류한 친족들이 [[공부가주]]를 가지고 대접하자 [[문화대혁명]] 중에 공림이 [[홍위병]]의 만행으로 파괴된 사실 때문에 분격하여 "우리 가문은 이런 술은 모른다(我们孔家没有这种酒)"고 함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적이 있다고 한다. 공부가주의 존재가 가짜라는 얘기가 아니라, [[중국|중공]] 정권이 문혁 시기의 만행에 대해 일체의 반성도 하지않은 채로,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만 노리고 환심을 사려는 것에 대한 반발을 드러낸 발언이다. 원래도 공산당이 타도의 대상으로 천명했던 공자의 후손인 그가 공산당과 친할 수 없는 관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공산당은 개혁개방 이후 공산주의보다는 유교를 일당독재의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공자를 이용하고 있다. 다만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대만도 자유롭지는 않다. 공화국이지만 국가가 특정 가문 종손을 위해 형식적이지만 관직을 만들어놓는다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것을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민주주의 국가라도 [[입헌군주국]]으로 왕실이 있는 국가들도 많으므로 이와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애시당초 공씨 가문이 받은 작위인 연성공부터가 이미 정치적인 목적으로 수여된 것이다. 역대 중국 왕조가 대대로 우대한 공자의 가문을 품고 있다는 것은 중화로서의 정통성 확보에 큰 명분을 안겨주기 때문. 하지만 동시에 공씨 가문은 역대 중국 왕조의 가장 중요한 학문인 유교의 시조의 가문인 이상 예우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집안인 것도 사실이다.] 쿵더청은 특히 [[문화대혁명]] 중 자행된 반달리즘으로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문제는 이 때 [[홍위병]]들이 '''가문의 무덤을 모조리 파헤치고 심지어 시체를 끄집어내 나무에 매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공산정권에 극도의 반감을 품어 1990년 1월, 누나 쿵더마오와 재회할 때도 중국 본토에서 만나기를 거부하고 일본과 대만에서 2차례 만났다. 다만 일본에서 이루어진 최초 상봉은 계획적 만남이 아니라, 일본에서 강연이 있을때 쿵더마오의 일본인 지인들이 황급히 쿵더마오를 초청하여 상봉을 주선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때의 만남은 겨우 30분 동안 이루어졌으며 제대로 된 상봉은 1995년, 쿵더마오의 대만 방문으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쿵더청은 곡부의 공묘에 묻히지 않은 공씨의 종손 3명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묘는 [[신베이시]] 싼샤구에 있다.) 공씨 종가가 대만으로 이주한 현재는 앞으로도 계속 신베이에 공씨의 종손들이 매장될 것으로 예상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