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퀘벡주 (문단 편집) === 누벨 프랑스 === 이후 이 일대는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리슐리외]]에 의하여 일백조합인상사(Compagnie des Cent-Associés)가 설립되어 식민지 교역을 독점하며 지속적으로 원주민과의 모피 교역을 확장해 나갔다. [[몬트리올]]도 이러한 확장을 통해서 1642년 건설된 도시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적은 인구로 인하여 식민지 운영이 쉽지 않았고, 루이 14세는 [[왕의 딸들]]이라 불리게 되는 약 800명의 여자들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 '왕의 딸들'을 소재로 한 [[http://m.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blio.bid=6774564|소설이 있다.]] 1660년 당시, 프랑스 정착민들의 인구는 겨우 2500명이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중반까지 프랑스 정착민들이 상당수 왔지만, 죽거나 프랑스로 되돌아가는 수도 많았다. 오늘날 캐나다와 미국에 거주하는 프랑스계 1천만 명은 초기 정착민 2,600명의 후손들이라고 하며, 이들은 유전적 다양성이 적어 관련 의학 연구에 유용하다고 한다. 하지만 171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맺어진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루퍼츠랜드와 뉴펀들랜드 섬, [[노바스코샤]] 지역이 영국에 할양되었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여전히 퀘벡을 포함해 캐나다의 대부분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다. 1756년 일어난 [[프랑스-인디언 전쟁]]은 퀘벡 역사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오하이오]] 지역에서 영국군과 충돌한 프랑스군은 [[루이 조제프 드 몽캄]] 후작의 지휘 하에 주요 전투에서 승리를 하며 영국군을 봉쇄했는데 1758년에 이르러 영국의 피트는 이러한 상황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고 [[제임스 울프]] 장군과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역공을 개시한다. 이러한 역공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퀘벡 시]] 일대까지 물러났다. 1759년 9월 퀘벡 근교의 [[아브라함 평원 전투|아브라함 평원에서 양측 군대가 회전을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루이 조제프 드 몽캄]] 후작과 [[제임스 울프]] 장군 모두 전사를 하는 격전 끝에 영국군이 승리하였고 완전히 포위를 당한 퀘벡시는 결국 영국군에게 항복한다. 그렇지만 아직 몬트리올의 프랑스군과 총독은 항복하지 않았고, 이들은 본국에서의 지원을 기다리며 퀘벡을 탈환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퇴각했다. 이때는 이미 본국의 수송선이 영국 해군과의 해전에서 패퇴한 시점이었다. 결국 1759년 영국군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7년 전쟁의 종결과 함께 맺어진 파리 조약에 따라서 퀘벡은 영국에게 할양되었다. 말하자면 [[신세계]]를 정복하려고 왔다가 자신들이 정복당한 상황. '정복당한 정복자'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