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라쿠프 (문단 편집) === 폴란드의 수도 (1040 ~ 1596) === 1138년부터 1320년까지 폴란드가 분열되어 극도의 혼란기로 떨어지는 바람에 도시는 여러 공작들에 의해 뺏고 뺏기는 쟁탈의 장이 되었다. 도시를 차지한 공작은 크라쿠프 공작이자 폴란드의 [[대공(작위)#s-3.3|고공]]으로서 폴란드를 대표하는 지배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 타이틀을 얻기 위해 공작들은 이 도시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퉜다.[* 1138년 볼레스와프 3세 사후 왕의 유언에 따라 네 아들들, 미망인이 폴란드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 그 중 크라쿠프가 있는 마워폴스카(소폴란드), 비엘코폴스카(대폴란드) 동부, [[그단스크]]가 있는 포메렐리아 등 핵심지역은 '연장자령(크라쿠프 공작령)'으로서 자식들 중 최연장자가 자신의 영지에 더해 추가로 이 지역을 통치하고 전체 폴란드를 대표하는 고공(Maximus Dux)이 되도록 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아들들이 땅을 가지고 싸우지 않도록 유언에 여러 장치를 마련해 두었으나, 이것들은 곧 무시되었고 아들들은 '연장자령'을 가지기 위해 싸워댔다. 아들들의 대가 지나고 나서도 각 공국들은 이 지역에 있는 수도 크라쿠프, 그리고 고공의 타이틀을 놓고 다퉜으며 각종 외교적, 군사적 이유로 고공들이 자리를 넘겨주는 일이 잦았다. 이때의 폴란드 고공 중에는 3번이나 물러났다가 다시 복위하여 재위가 4파트로 나뉘는 산도미에시 공작 레셰크 1세, 대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3세 같은 자들도 있었다. 이 와중에 기존의 공국이 쪼개져서 새로운 공국들이 형성되기도 했고, 고공위을 차지한 마조프셰 공 콘라드 1세가 1226년 이 지역에 독일 기사단을 불러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혼란은 쿠야비야(Kujawia) 공 브와디스와프 1세가 크라쿠프와 폴란드 상당부분을 정복하고 1320년 폴란드 왕으로 대관하면서 끝났다. 아들 카지미에시 3세(카지미에시 대왕)는 1351년 마조비아 공국을 속국화하며 폴란드의 통합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보헤미아의 영향에 들어간 실롱스크 공국, 독일화 되던 그리핀 가문의 포메른 공국은 끝내 통합하지 못했다.] 그러던 1241년, 폴란드까지 침공한 [[몽골군]]은 크라쿠프 근방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무방비상태가 된 도시를 점령하고 완전히 파괴했다.[* [[헝가리 왕국]]을 침입했던 [[몽골군]] 사령관 수부타이는 몽골군의 측면이 폴란드에 의해 위협받지 않기를 원했고 1240년 부장 바이다르(Baidar)와 오르다(Orda)에게 2개 튜멘(12,000 ~ 20,000명)을 붙여 폴란드를 침공케 했다. 몽골군은 기동력을 이용해 폴란드 각 공국의 군대가 연합하기 전에 각개격파하는 방식을 썼고 흐몔니크 전투(Battle of Chmielnik)에서 큰 승리를 거둬 크라쿠프를 무방비로 만들었다. 1달 뒤, 1241년 4월 레그니차 전투(Battle of Legnica)에서 폴란드 연합군은 전멸했고 폴란드 고공 [[헨리크 2세]]도 전사했다. 폴란드가 어떤 꼴을 당한 지 지켜본 [[보헤미아 왕국]]은 헝가리에 원병을 파견하지 않고 자국 방어에만 전념했다.] 도시는 1257년 이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재건되었고 [[마그데부르크]] 법에 의거해 도시 특권까지 부여받았지만 단 2년 뒤 1259년 폴란드를 다시 침공한 몽골군에게 또다시 파괴되었다. 1287년 몽골군은 3번째로 폴란드를 침공했지만 원정이 실패함에 따라 크라쿠프는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폴란드가 1300 ~ 1306년까지 [[보헤미아 왕국]] 프르세미슬 왕조와 [[동군연합]]으로 묶였기 때문에 크라쿠프도 잠시 보헤미아 왕국의 영향권에 들게 되었는데, 이때 [[체코인]], [[독일계 폴란드인|독일인]]들이 도시에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군연합이 끝나고 새로 즉위한 보헤미아 [[룩셈부르크 왕조]]의 [[얀 루쳄부르스키]]는 폴란드 고공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사주로 [[독일인]]이었던 크라쿠프 시장[* 1257년 도시 특권을 얻으면서 고공의 지배력을 줄이고 광범위한 자치를 누렸다.] 알베르트가 1311년 도시 내 체코인들과 독일인들을 선동해 당시의 고공이던 브와디스와프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도시를 차지하고 보헤미아와 병합하려 했지만 1년에 걸친 포위 끝에 결국 진압되었고 도시내에서 독일인들의 영향력은 크게 줄었다. 1320년 [[폴란드 왕국]]의 혼란이 끝난 뒤 폴란드가 [[카지미에시 3세]](이하 카지미에시 대왕으로 칭함)의 통치 아래에서(1333~1370년) 안정과 번영을 누릴 때, 크라쿠프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왕의 거처였던 바벨 성이 거대하게 증축되었고 성의 나무부분이 모두 석재로 바꾸어졌다. 또한 이 시기 중앙 광장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랜드마크들이 세워졌다. 기존에 있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모승천성당이 독특한 폴란드 고딕양식으로 재건되었고 1358년엔 중앙 광장의 목재로 지어진 시장이 고딕양식의 직물회관으로 탈바꿈했다. 이 직물회관에서 상인들이 회의를 하거나 각종 업무를 보았고 크라쿠프와 중부유럽 일대의 직물, 그리고 근처의 비엘리츠카 암염광산에서 대량으로 산출되던 소금이 동방의 비단, 향신료 등과 교환되었다.[* 당시 크라쿠프 직물회관은 지금 남아있는 것보다 규모가 더 커서 2개의 화물계량소도 별채로 달려 있었다. 하지만 이 건물들은 크라쿠프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19세기 중반 확실치 않은 연도에 철거되었다. 한편, 직물회관은 크라쿠프 외에도 유럽의 내로라하는 무역도시들에도 여럿 세워졌다. 독일의 브라운슈바이크, 영국의 헬리팩스 등에도 아직 직물회관이 남아있는데 대부분 큰 특색이 있거나 하진 않다. 하지만 1304년 전형적인 브라반트 고딕양식으로 세워진 벨기에 이프르의 직물회관은 당시 플랑드르의 경제적 번영을 상징하듯 크라쿠프의 직물회관만큼 크고 아름답다. 현재는 이프르 전투 기념관, 1차 세계대전 박물관(In Flanders Fields Museum)으로 쓰인다.] 1364년에는 크라쿠프에 프라하에 이은 중부유럽 두번째 대학교인 크라쿠프 학당[* 후에 폴란드 왕이 되는 [[브와디스와프 2세|브와티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의 이름을 따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으로 개명되었다.]이 세워졌다. 이 무렵 약 1370년 경, 크라쿠프는 [[한자동맹]]의 회원이 되기도 했다. 다만 한자동맹과는 매우 느슨하게 연결되었는데, 회원비를 내지도 않았고 동맹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결국 1500년 경 아예 탈퇴한다.] 한자동맹에서의 위치와는 별개로 14세기 후반~15세기 초, 크라쿠프는 중부유럽의 주요 무역 중심지였고 수많은 장인들이 찾아와 길드를 세웠다. 또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동군연합을 이루게 된 뒤, 강력한 국가의 수도로서 예술 과학 분야의 많은 신문물이 이 도시로 들어왔다. 14세기 말 크라쿠프는 3,500명의 독일, 체코인을 포함 인구 15,000명을 자랑하는 중부유럽의 대도시였다. 이 시기 크라쿠프는 전형적인 중세 말 유럽 대도시의 성장 양상을 보여준다. 특이하게도, 당시 유럽 전역과 북아프리카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 넣던 흑사병(대략 1346~1353까지 유행)이 크라쿠프에는 큰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 이것은 폴란드의 다른 주요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은데 당시 폴란드의 왕이었던 카지미에시 대왕이 현명하게 국경을 봉쇄하고 여행자들의 이동을 막았다는 점, 당시 폴란드의 인구밀도가 매우 낮았고 무역이 지중해 연안이나 발트해, 북해 연안보다 적었다는 점, 그리고 (확실치 않지만) 폴란드인들이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아 쥐가 적었다는 점 등이 있다. 한편 흑사병 유행기간동안 유럽 전역에서 사회 혼란을 조장한다는 의심을 받고 끔찍한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은 이 시기 유대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던 카지미에시 대왕의 폴란드로 대거 이주했다. 크라쿠프에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들어왔으며 이들은 크라쿠프 시가지 남쪽의 왕의 이름을 딴 '카지미에시(Kazimierz)'[* 현재 이 지역은 유대인 문화가 '''복원'''되어 있는 곳으로 크라쿠프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다.]라는 구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5세기 중순부터 크라쿠프는 폴란드가 르네상스를 받아들이는 창문으로서 기능했다. 이 시기부터 1596년까지 크라쿠프에는 수많은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찾아와 도시는 문화적으로 크게 발전했다. 프란체스코 피오렌티노(Francesco Fiorentino), 산티 구치(Santi Gucci) 등 이탈리아의 화가들이 도시로 들어와 도시 곳곳에 자신의 작품을 남겼고 도시 자체도 수많은 지성인과 예술가들을 배출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에서 공부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였다. 독일 출신의 예술가도 종종 들어왔는데, [[뉘른베르크]] 출신의 바이트 슈토스(Veit Stoss)는 1489년 성 마리아 성당의 정교하기 그지없는 대제대(High Alter)를 완성시켰다. 1500년에는 인쇄소가 등장해 수많은 인문저작들이 발간되었다. 1507년 왕으로 즉위한 [[지그문트 1세]]는 1499년 화재로 파괴된 바벨 성을 기존의 토대 위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했고, 피렌체의 건축가였던 바르톨로메오 베레치(Bartholommeo Berecci)의 지휘 하에 약 30년에 걸쳐 성을 아름답게 다시 지었다. 이 성에는 17세기 중반 바로크 양식의 궁전도 들어섰는데, 이 때문에 여러 건축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 밖에도 미처 서술하지 못할만큼 많은 문화적 성장이 이루어 졌으며 중앙 광장은 여전히 상인들로 붐볐다. 현재 크라쿠프에 남아 관광객들을 끌어모으는 주요 랜드마크들의 원형은 대부분 14~16세기가 원형이다. 카지미에시의 유대인 공동체도 왕국의 관용 아래 번영했다. 이 시기 카지미에시에 지어진 시나고그들은 아직도 상당수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나고그들로서 남아있다. 하지만, 약 300여년의 번영을 누리며 중부 유럽의 보석으로 빛나던 크라쿠프에 점차 몰락의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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