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라쿠프 (문단 편집) === 명목상의 수도 (1596 ~ 1795) === 1569년 연방이 결성되었을 때, 크라쿠프는 남쪽으로 좀 많이 치우쳐 있었다. 바사 가문의 [[지그문트 3세 바사|지그문트 3세]]가 연방의 왕이었던 시기, 연방은 1592년부터 1599년까지 [[스웨덴]]과 [[동군연합]]을 이뤘는데, 폴란드 공주 출신이었던 어머니 [[카타지나 야기엘론카]][* [[지그문트 1세]]와 보나 스포르차의 막내딸.]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로 자란 지그문트 3세는 [[루터파]] 국가였던 스웨덴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숙부인 [[칼 9세|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으로부터 스웨덴 왕위를 위협받았다. 바르샤바는 크라쿠프와 빌뉴스 사이에 있어 연방 내 주요도시들과 연결성이 좋았고 지그문트 3세가 스웨덴의 상황에도 재빨리 대처해야 되었기에, 1595년 바벨 성에 불이 난 것을 계기로 1596년 지그문트 3세는 왕궁을 바르샤바로 옮겼고 1611년부터 계속 거기서 거주했다. 정부기관들도 왕궁을 따라 바르샤바로 이전하면서 크라쿠프는 실질적인 수도로서는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공식적인 수도는 폴란드 2차 분할 (1793년)때까지 크라쿠프였고 왕의 대관, 장례식 등 각종 왕사(王事)는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에서 시행되었다. 수도의 기능을 빼앗긴 뒤, 크라쿠프는 천천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1652년 두 차례의 재앙이 도시의 쇠락을 가속화했다. 1652년 도시에선 페스트가 번져 수천명이 사망했고 같은 해 큰 홍수(문자 그대로의 의미)까지 발생해 도시를 파괴했다. '[[대홍수(역사)|대홍수]]' 시기 폴란드 상당부분이 [[러시아 제국군|루스 차르국군]]과 [[스웨덴군]]에게 점령당할 때, 크라쿠프도 1655년 스웨덴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도시는 약탈당했고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으며, 조금씩 폐허가 되어가던 바벨 성도 이 점령으로 많이 부서졌다. 18세기 초 [[대북방전쟁]] 때 크라쿠프는 1702년 다시 [[칼 12세]]가 이끄는 스웨덴에 함락되었고 1707~1710년까지 역병이 또 발생하여 수만명이 죽었다. 1738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때는 [[러시아 제국군]]에게 점령당했다. 17~18세기동안 크라쿠프보더 더 많이 쟁탈의 장이 되었던 바르샤바는 수도로서 기능했기에 재건의 기회를 많이 부여받고 점점 더 아름다워졌지만 크라쿠프는 빠르게 재건되지 않았다. 폴란드 분할 직전에 이르기까지 크라쿠프의 이야기는 많지 않다. 1794년, 폴란드 민족에게 크라쿠프가 가지는 중요성을 다시 각인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제2차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인이 분노에 빠졌을 때, [[미국 독립전쟁]]에서 돌아와 연방군의 중장으로 재직 중이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Tadeusz Kościuszko)는 러시아군이 잠시 크라쿠프를 빠져나가자[* 1794년,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은 연방에 군대의 대부분을 해체하라고 종용했다. 남은 부대는 러시아군으로 편입되었다. 바르샤바에서는 혁명을 기획하던 저명한 정치인, 장군들이 체포되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대처해야 되었기에 러시아군은 도시를 잠시 비울 수밖에 없었다.] 3월 23일 크라쿠프 중앙 광장의 직물회관 앞에서 봉기를 선언했다.(코시치우슈코 봉기) 곧 6,000여명의 봉기군을 모집한 그는 바르샤바로 진격을 개시했고 4월 4일 크라쿠프 근방 라츠와비체(Racławice)에서 4,000의 러시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인해 봉기는 연방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러시아군이 빠르게 대처에 나서고 프로이센의 지원까지 이어지면서 봉기는 실패하고 만다. 코시치우슈코 본인도 마치에요비체 전투에서 패해 러시아군에 사로잡혔다.[* 코시치우슈코는 1817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방부처리되어 크라쿠프의 성 플로리안 성당에 안장되었고 그의 심장은 따로 유골함에 보관되어 스위스의 폴란드 박물관에 보관했다가 폴란드 독립 후 1927년 반환되었다. 2차대전 중 다행히 유실을 면했고 지금은 바르샤바 왕궁의 채플에서 볼 수 있다. 코시치우슈코는 폴란드 최고의 민족 영웅 중 한명으로서 폴란드 전역에서 그의 이름을 딴 구조물, 기념비 등을 볼 수 있다.] 봉기가 진압된 뒤 1794년 6월 15일 [[프로이센군]]이 도시로 들어왔다. 이들은 곧 바벨 성의 왕실 보물고도 점령했고 보물들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지시하에 비밀리에 베를린 왕궁으로 옮겨졌다. 1809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폴란드 왕들의 레갈리아[* Regalia.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품들. 주로 왕관, 왕홀, 왕구로 구성되며 검이나 박차 등이 추가되기도 한다. 보통 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 레갈리아를 만들어 썼다.]를 모두 녹여 금화로 만들어 폴란드의 보물을 훼손했다. 따라서 현재 남아있는 폴란드의 레갈리아는 모두 복원품이다. 다시 돌아와서, 봉기에 놀란 주변 3국은 3차 폴란드 분할을 통해 연방을 지도에서 지워버렸고 크라쿠프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귀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