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라쿠프 (문단 편집) === 오스트리아의 지배 (1795 ~ 1918) === [[나폴레옹 전쟁]]이 전 유럽을 휩쓸때, 구 연방영토의 폴란드인 다수 거주지역에 [[바르샤바 공국]]이 세워졌고, 공국이 오스트리아에 속한 폴란드 영토를 일부 회복함에 따라 1809년 크라쿠프도 공국에 속한 도시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빈 회의에 따라 바르샤바 공국 대부분이 러시아와 강제로 동군연합으로 묶인 폴란드 입헌왕국으로 넘어갔지만, 크라쿠프는 부분적인 독립국으로서 1815년 약간의 근교 지역과 함께 [[크라쿠프 자유시]]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보호령인 가운데 자유시는 상당한 자치를 누렸지만, 이후 수차례 폴란드 독립운동의 중심으로서 기능했다. 폴란드 전역을 휩쓴 1830년 11월 봉기 때 크라쿠프는 러시아의 영향에 있지 않아 봉기 현장이 되진 않았으나, 폴란드 입헌왕국으로 무기를 밀반입하는 창구로서 입헌왕국을 크게 도왔다. 이 때문에 크라쿠프의 행위에 분노한 러시아의 요구로 이 도시 또한 자치가 크게 제한되었다. 경찰은 오스트리아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시민들이 뽑은 시장은 주변 3국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당연히 시민들의 분노는 커져갔고, 1846년 2월 20일 자유시의 주권을 넘어 공화국의 형태로 나라를 되찾고자 공화주의자 귀족, 지주, 중산층을 중심으로 크라쿠프 봉기가 일어났다. 도시의 봉기가 성공하면 또다시 폴란드 전역에 봉기가 퍼질 것으로 생각한 봉기군은 도시의 정치가였던 얀 티소프스키의 지휘 하에 오스트리아와 맞섰다. 하지만 초급 장교들이 이끌던 11월 봉기와 달리, 크라쿠프 봉기군의 지원자들은 훈련되지 않았고 무기도 형편없었다. 결국 크라쿠프 근교에서 벌어진 그도프 전투(Battle of Gdów)에서 참패했고, 봉기의 지도층이던 귀족, 지주들에 불만이 많던 근교의 [[농노]]들도 오스트리아를 도와주면서[* 이때,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은 농노들에 의해 크라쿠프 자유시와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 전역에서 1,000명 가까운 슐라흐타(폴란드 귀족), 지주들이 살해되었고 500개 이상의 장원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역사는 이것을 갈리치아 학살(Galician slaughter)이라 한다.]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봉기 진압 후 1846년 11월 16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협약을 맺어 자유시를 없애버리기로 했고 결국 자유시는 오스트리아의 구성국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Kingdom of Galicia and Lodomeria)의 일부로서 [[크라쿠프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제국에 편입되었다. 도시의 정치적 입지가 줄어드는 가운데, 1850년 대규모 화재까지 도시를 덮쳐 약 10%의 시가지가 전소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를 지나고 나서 크라쿠프는 외세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에도 제 2의 전성기라고 할 만큼 다시 번영하기 시작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한 뒤, 오스트리아 제국은 국내에서 점점 끓어오르던 민족주의의 위협에 시달렸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1867년 헝가리와 동군연합을 결성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재탄생했다. 제국은 헝가리를 독립시킨 것 뿐 아니라 보헤미아, 갈리치아 등 시스라이타니아로 설정된 영토에 향상된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갈리치아의 크라쿠프도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광범위한 자치를 부여받게 되었다. 시 정부와 의회, 학교에선 다시 폴란드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프리비슬린스키|러시아령 폴란드]]나 [[포젠|독일령 폴란드]]에선 상상하기 힘든 특혜였다. 크라쿠프는 나라 잃은 폴란드 민족의 문화적, 예술적 상징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많은 폴란드인들이 모여들어 크라쿠프 황금기 시절의 유산들을 도시에 모아두었고 예술가와 학자들이 이곳에 거처를 두고 활동했다. 폴란드 민족주의 운동도 이 도시에서 다시 전개되기 시작했다. 후에 폴란드 군단을 이끌며 독일과 오스트리아 편에서 러시아와 맞서 싸운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오스트리아의 묵인 하에 크라쿠프에 군사학교를 두고 세력을 불렸다. 자치의 기간 동안 도시는 새롭게 단장했다. 그간의 쇠퇴, 1850년의 화재로 말미암아 도시의 시가지 상당부분은 노후하고 낡은 건물들, 폐허로 채워져 았었다. 시 정부는 도시의 낡은 부분을 새롭게 개축했고 새로 칠을 하거나 당시의 건축양식으로 건물을 올리기도 했다. 너무 낡거나 도시의 기능 향상을 가로막는 건물은 헐어버리기도 했다. 낡아서 점차 버려져가던 직물회관도 이때 깔끔하게 재건축되었다. 도시는 다시 아름다워졌다. 현재 크라쿠프의 구시가는 이때 새단장한 거리가 원형이며, 거리를 걷다 보면 적당히 오래되었으면서도 깔끔하게 잘 조성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 밖에도 1901년 상수도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전차가 개통되며 현대적인 도시기능이 추가되었다. 근교에는 크라쿠프 요새가 건설되어 도시의 방어력을 증대시켰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그의 재위 기간동안 크라쿠프를 여러 번 방문했는데, 이때마다 자치를 부여해 준 것에 감사하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에 크라쿠프는 1914년 겨울 러시아의 공격을 받았다. 시 정부는 많은 시민들을 [[모라비아 변경백국]]으로 대피시켰지만, 전투는 대부분 새로 지은 크라쿠프 요새 주변에서 치러졌고 다행히 도시에 포탄이 쏟아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1918년 11월 3일, 전쟁을 견디지 못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항복하면서 도시에 주둔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떠났고 크라쿠프는 다시 신생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