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라튈로스 (문단 편집) === 규약주의 비판 === 헤르모게네스는 소크라테스에게 가르침과 중재를 부탁한다. 헤르모게네스는 [[언어철학|사물에 붙은 이름들이 자연적으로 생겨난 건지, 아니면 사람들이 임의로 만들어낸 건지]]에 관해 크라튈로스와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크라튈로스는 이름을 붙이는 규칙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이는 [[고대 그리스어|그리스에서나]] [[외국어|이민족들에게나]] 같다고 주장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를 물으니 크라튈로스가 빙글빙글 돌려 말하기만 하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정확히 말을 하지도 않으면서, [[닉값|나 크라튈로스는 크라튈로스고 소크라테스 선생님은 소크라테스지만 너는 헤르모게네스가 아니라는]] 말만 한다는 것이다. 헤르모게네스가 생각하기에, 이름이란 것은 단순한 사회적인 합의에 불과하지 원래부터 올바른 이름과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해 토론을 해보려는데 크라튈로스의 태도가 매우 불량해서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것들은 그것이 어떻게 해서 그런지 이해하기 어려운 법이라는 속담[*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솔론]]이 했다고 전해진다.]을 인용하며 소피스트 강연을 듣다 말아서 자신도 이름의 올바름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크라튈로스가 하는 말은 자네를 놀리려 하는 것 같다고 하며 속담을 인용하며 말했듯이 이름에 관해서는 알기 어려우니 둘의 주장을 하나하나 따져보자고 제안하며 이름에 관한 탐구에 들어간다. 헤르모게네스는 자기는 이름의 올바름이 자연적 법칙이 아니라 [[언어의 사회성|합의나 동의에서 나올 뿐]]이라고 여긴다고 생각한다며 그 외의 다른 주장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기가 보기엔 [[언어의 자의성|누군가가 어떤 것에 무슨 이름을 붙이든 그것은 옳은 것]]이고 [[몽미|다른 사람이 이름을 다시 한번 바꿔 부르더라도 그 이름 역시 올바르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마치 집안 노예들의 이름을 바꾸어 줄 때 옛 이름과 나중 이름 모두 올바른 것 처럼 말이다. 헤르모게네스는 이것과 다른 방식이 있다면 크라튈로스에게서든 소크라테스에게서든 당장 배울 준비가 되었다고 단언한다.[* 헤르모게네스의 주장이 크라튈로스의 자연주의보다 현대 언어학에 부합하기는 하나 헤르모게네스의 주장 역시 사회 규범을 강조하며 언어의 사회성을 주장하다가도 이름을 임의로 고쳐 불러도 그것 역시 올바르다면서 언어의 사회성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잠자코 듣더니 문답을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이름은 어떻게 붙이든 붙이는 사람 나름이라는 헤르모게네스의 주장을 재확인 한 후 그럼 지금 당장 내가 [[몽미|사람을 '말'이라 부르고 말을 '사람'이라고 부르더라도 옳다고 여기냐]]고 묻는다. 헤르모게네스는 자신있게 그렇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바꾸어 참과 거짓, 그리고 참말과 거짓말이 실존한다 생각하냐고 묻고 헤르모게네스는 이 역시 그렇다고 답한다. 헤르모게네스는 그렇다면 '있는 것들'을 있다고 말하는 게 참이고 없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 맞냐고 묻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참말의 부분은 참이고 거짓말의 부분은 거짓이니 참말과 거짓말을 이루는 부분인 이름에 관해서도 참과 거짓을 논할 수 있겠냐고 묻고 헤르모게네스는 동의한다. 즉 참인 이름과 거짓인 이름이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한 것이다.)[* 괄호 친 부분은 큰 틀에서는 헤르모게네스의 규약주의를 비판한다고 볼 수 있으나 논의의 흐름 면으로 보아도 뜬금없고 논리적으로는 소크라테스가 [[논리적 오류/비형식적 오류/귀납적 오류|분해 오류]]를 저지르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대화편 속 소크라테스가 이데아에 근거하여 일정부분 자연주의를 수용하기에 그런 관점에서는 논리적 오류로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다른 대화편에서 비슷한 논의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흐름에 맞게 이 부분의 위치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옥스퍼드 판본(OCT)에서 이 구절이 삭제되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럼 각자가 어떤 것의 이름이라고 말하는 것이 곧 각 사물의 이름이냐고 묻고 헤르모게네스는 이 역시 그렇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럼 각 사물들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붙이는 만큼의 이름을 가지냐고 묻고 헤르모게네스는 당연히 그렇지 않냐면서, 자신도 이름을 마음대로 붙일 수 있고 소크라테스 역시 마음대로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어|이민족들의 언어에는 각 사물을 부르는 이름이 그리스어랑은 딴판이지 않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소크라테스는 헤르모게네스가 '있는 것들' 역시 언어와 같은 것으로 여기는지 한번 검토해보자며, [[프로타고라스]]가 주장한 대로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 [[상대주의|세상 모든 것은 그 사람이 받아들이는 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냐고 묻는다. 헤르모게네스는 예전엔 프로타고라스를 추종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믿지 않는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혹시 선악 역시 상대적이기에 나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본 적 없냐고 묻지만 헤르모게네스는 자기는 나쁜 사람은 아주 많다고 생각한다고 부정한다. 그럼 훌륭한 사람은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주 적지만 존재한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말한 것이 진리라면 세상엔 분별있는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지 않겠냐 하며 오히려 헤르모게네스는 프로타고라스보다는 에우튀데모스[* 소피스트로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 <에우튀데모스>의 등장인물이기도 하다.]처럼 [[절대주의|절대적 선악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결론내린다. 헤르모게네스 역시 맞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모든 사물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과는 관계 없이 [[이데아|각각 자신들만의 본질]]을 가지고 있을 텐데 그 사물들로 말미암아 생기는 행위들 역시 '있는 것들'의 일부이니 마찬가지 아니냐고 묻는다. 헤르모게네스가 그렇다고 답하자 소크라테스는 행위 역시 본성에 따라 행해지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해지지는 않는 것 같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라야 할 때 우리가 원하는 도구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용하는게 아니라 [[칼|자른다는 행위에 걸맞는 도구]]를 올바르게 사용해야 잘 자를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헤르모게네스가 이에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말 역시 행위이니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말을 하는게 아니라 본래의 [[문법|방식]]과 [[단어|도구]]를 이용해 말을 해야 올바르게 말 할 수 있지 않겠냐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런데 이름을 부르는 행위 역시 말의 부분이자 행위의 일종 아니냐고 한다. 즉 이름을 부르는 것도 [[우린 이것을 얼음이라 부르기로 약속했어요|본래의 방식과 도구를 이용해야 제대로 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뚫어야 할땐 송곳을, 짜야 할땐 베틀을 쓰듯이 이름을 불러야 할 때는 이름이라는 도구를 이용한다. 이름이라는 도구의 기능을 정의하자면 [[교육|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분류|본질을 가를 때]] 쓰는 것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그런데 베틀은 (아무나 만드는게 아니라) 목공이, 송곳은 대장장이가 만드는 것처럼 도구의 일종인 이름 역시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만드는게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헤르모게네스에게 우리가 사용하는 이름은 누구의 제작자인지 묻는다. 헤르모게네스가 모르겠다고 답하자 소크라테스는 이름 제작 기술자는 규칙을 부여하는 이이니 입법가라 부르는게 적당할 거라고 한다. 이러한 입법가들은 많은 기술자중에 가장 드문자들 같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플라톤 대화편에서는 아테네 [[직접민주주의]] 비판을 위해 수많은 분야에서 다수 대중보다는 소수 전문가, 혹은 기술자가 현명하지 않냐는 주장을 펼치는데 이 단락 역시 그 연장선 상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럼 입법가들이 이름을 만들때 어디에 주목하는지 살펴보자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설명에 따르면, 목공들은 베틀을 만들 때 [[이데아|그 기능을 만들어주는 베틀의 형상]]에 주목해 [[나무|재료]]에다가 베틀의 형상을 구현시킨다. 마찬가지로 옷을 만드는 기술자들 역시 [[옷감|재료]]에다가 옷의 형상을 알맞게 구현시킨다. 비슷하게 입법가 역시 각 사물에 적합한 이름을 음성과 음절에 구현시킨다. 그리고 대장장이들이 항상 같은 철에 송곳을 구현하는게 아닌 것 처럼 입법가 역시 [[외국어|자기 나라의 음성과 음절에 걸맞게 이름을 구현시키는데]] 그리스와 이민족 나라에서 사용하는 이름이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서 난 다른 철에, 이민족 대장장이 손에 구현되었더라도 제 역할을 다하는 송곳은 훌륭한 도구인 것 처럼 이민족 언어에 구현된 이름 역시 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다면 제대로 된 도구이다.[* 언어의 규약주의와 상대주의의 대표적인 논거가 (헤르모게네스가 극초반에 말한 것처럼) 언어마다 단어와 문법이 확연히 다르고 서로 연관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인데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이를 비판하는 근거해 나름대로 자연주의를 지지하는 논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현대 언어학의 시야로는 [[언어의 사회성]]에 반대하고 언어가 절대적 본질, 즉 [[이데아]]를 반영한 결과라는 주장이 그다지 설득력있진 않지만 [[언어의 사회성]]마저 일부 무시할 정도로 [[언어의 자의성]]을 주장하는 헤르모게네스를 효과적으로 비판하는 면은 현대 기준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주제로 넘어가, 헤르모게네스에게 베틀이 그 [[이데아|형상]]을 제대로 반영해 적합하게 만들어졌는지를 평가하는 이는 그걸 제작한 목공인지, 아니면 사용하는 직조공인지를 묻는다. 헤르모게네스는 직조공 쪽인 것 같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뤼라가 잘 만들어졌는지를 감독하는 이는 연주자, 조선공의 제작물에 대해서는 조타수인 것 처럼 이름 역시 사용하는 사람이 만듦새를 감독하는데, 질문과 대답에 능한 변증술 전문가들이 그 감독자들 아니겠냐고 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이름 붙이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하찮은 일이 아니고 크라튈로스의 말대로 이름은 각 사물들에 본래 존재하며 입법가들이 심사숙고해 [[이데아|사물들의 형상]]을 구현해 만드는 게 맞는 것 같다며, 크라튈로스의 자연주의를 지지하는 결론을 낸다.[* 하지만 대화편 후반부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자연주의와 크라튈로스 역시 비판한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이 자연주의를 지지하는지, 규약주의를 지지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는 각 사물의 절대적 본질이 존재한다는 [[이데아]]론에 기반한 자연주의자이지만 크라튈로스의 극단적 자연주의에 대비되는 온건파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