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레모나 (문단 편집) ===== 롬바르디아 동맹 ===== 이후 구도심과 시도심은 각각 [[기벨린]]과 [[구엘프]] 파로 나뉘었는데,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이탈리아 원정 시에는 밀라노의 지원을 받던 서북쪽의 도시 크레마를 견제하고자 황제 편에 섰고 그 공로로 1154년에 동전 주조권을 얻었다. 1162년에 크레모나와 황제의 연합군이 밀라노를 공격, 파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167년에 도시는 [[롬바르디아 동맹]]을 제창하며 편을 바꾸었고 황제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1176년 5월 29일에 벌어진 [[레그냐노 전투]]에서 크레모나가 속한 동맹군은 프리드리히 1세의 제국군을 격파하였다. 하지만 1213년, 프리드리히 2세의 사주를 받은 크레모나는 카스틸리오네 전투에서 밀라노 - 로디 - 크레마 - 코모 - 브레시아의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1232년에는 제국군과 함께 코르테누오바 전투에서 2차 롬바르드 동맹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크레모나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교황과 황제 편을 왔다갔다 하고 자신이 만든 롬바르디아 도시 동맹을 스스로 분열시키던 크레모나는 곧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의 미움을 샀다. 그리고 1248년 2월 18일에 파르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레모나와 제국군은 동맹군에게 대패하였고 2천명의 크레모나 인들이 포로가 되었다. 1250년부터 [[파르마]]와의 복수전에 돌입한 크레모나는 몇년 뒤에 파르마를 패배시켜 도시를 점령하였고, 적병의 군복 바지를 벗겨 (1190년에 완공된) 크레모나 대성당 천장에 매달아 조롱하였다고 한다. 한편, 강력한 기벨린 파였던 포데스타 (시장) 팔라빈치노는 1266년에 도시에서 추 방되었고, 1271년부터 콘술 (집정관) 제가 도입되며 기벨린 파는 몰락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