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렘린 (문단 편집) == 역사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동유럽의 주요 민족은 슬라브계, 게르만계, 투르크계, 그 외 토착 민족 세력들로 나뉜다. 이들 중 프리피야트 강 주변에 살고 있던 [[슬라브족]]은 5~7세기 경 동유럽으로 이주해 왔으며, 이들 중 동북쪽의 울창한 산림 지대로 나아가 정착한 이들을 따로 동슬라브족으로 구분하여 부른다. 이 동슬라브족들이 11세기부터 보로비츠키 언덕의 남서쪽 부근에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네글리나야 강과 모스크바 강이 합쳐지는 부근에 집단 거주지가 세워졌다. 이 촌락의 규모가 커지며 11세기 초반에 '''그라드'''라고 하는 목조 성채가 세워졌으며, 1156년에 [[키예프 루스]]의 대공이었던 유리 돌고루키(Юрий Долгорукий)가 이 요새를 대폭 확장하면서 본격적인 크렘린의 역사가 시작된다. 당대 러시아는 통일 세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키예프 루스를 중심으로 수많은 제후국들이 서로 키예프 대공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었다. 유리 돌고루키의 시대에는 제후국들 중 하나인 [[블라디미르-수즈달]]이 그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도 [[황금의 고리]]라고 부르는 여러 지역에 작은 나라들이 있었고 모스크바 지역은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지 않는 벽촌 지역이었다.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이 지금은 모스크바의 근교 [[위성도시]]인 것과 반대 상황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1237년에 [[몽골 제국]]이 대대적으로 [[키예프 공국]]을 침공하면서 키예프 대공과 블라디미르-수즈달의 위세가 크게 꺾였고, 본격적으로 [[타타르의 멍에]] 시기가 시작되면서 판도는 급변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더 서부 지역에 위치하여 타 제후국들에 비하여 몽골의 피해를 적게 받았던 모스크바가 몽골 치하의 러시아에서 점차 힘을 과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스크바는 타 러시아 제후국들에게 세금을 걷어 몽골에게 바치는, 일종의 대리인 역할을 하면서 몽골 하에서 힘을 키워나갔고, 이에 따라 모스크바의 중심지였던 크렘린 역시 점차 규모를 확장하는 등 점차 제대로 된 성채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파일:kremlin-12th-century.jpg|width=100%]]|| ||12세기 크렘린의 모습. 현재와는 달리 목재 성벽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1263년에 당대 블라디미르 대공이자 블라디미르-수즈달의 통치자였던 야로슬라프 3세가 조카인 다닐 네프스키[*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막내 아들이다.]에게 모스크바를 맡겨 변방으로 쫒아내었는데, 이로 인하여 뜻하지 않게 모스크바를 왕가의 혈통이 지배하게 되었고, 이를 명분으로 1283년에 본격적으로 다닐 네프스키가 다닐 1세로 즉위하면서 모스크바 공국이 건국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공국은 발전을 거듭하여 [[모스크바 대공국]]이 되었고,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대에 한 번이기는 했지만 몽골의 칸을 격퇴하기도 하였으며, 이 때에 떡갈나무 목재였던 크렘린의 성벽이 백색 석회암벽으로 바뀌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절에 지어진 하얀 크렘린 성벽은 무명용사의 묘와 알렉산드로프스키 사트 사이에 일부 남아있다.] 그의 아들인 [[바실리 1세]]는 요새 안에 예배당과 교회 등을 지었다고 한다. 한편 15세기에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몽골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전 러시아를 통일하였으며, [[이반 3세]]가 벽돌로 된 벽과 탑, 그리고 성문 등을 개축하여 왕성에 걸맞게 규모를 크게 확장하였다. 이반 3세는 이탈리아의 건축가 3명을 불러 크렘린을 완전히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성벽도 크게 개축하였다. 현재 볼 수 있는 크렘린의 성벽이 대부분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16세기 초반에는 요새 내부에 이반 대제 종탑이 세워졌으며, '''키타이고로드'''라고 불리던 저잣거리와 크렘린 사이에 폭이 30m에 달하는 거대한 도로를 만들어 요새와 시가지를 구분하게 하였다. 점차 모스크바 대공국이 왕국의 형태를 갖추고, 그 후 대공의 권위를 강력하게 강화한 [[이반 뇌제]]가 등장하면서 크렘린은 확장을 거듭했다. 이반 뇌제는 [[성 바실리 성당]]을 지어 대공의 권위를 과시하기도 했으며, 크렘린 궁전도 다시 리모델링할 정도로 모스크바 대공국의 전성기를 이끌기도 했다. 다만 대공국의 전성기도 오래가지 않았는데, 1598년에 [[류리크 왕조]]의 마지막 차르 [[표도르 1세]]가 후계 없이 사망하면서 약 15년 동안 대공이 없는 [[동란 시대]]가 다가왔던 것이다. 이 시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기근이 닥치면서 주민의 3분의 1인 200만 명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1613년]]에 [[미하일 1세]]가 동란 시대를 끝내고 [[로마노프 왕조]]를 개창한 이래로 크렘린에는 새로운 건축물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미하일 1세와 그의 아들인 [[알렉세이 1세]]는 크렘린에 11개의 돔을 가진 사치스러운 구세주 성당을 지었으며, 개선문 등을 짓는 등 크렘린에 대대적인 공사를 계속했다. [[1636년]]에는 [[차르]]와 그 가족의 저택인 첼무노이 궁정이 건설되었는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3층으로 된 아름다운 석조 건물로 러시아의 전통적인 목조 가옥 양식을 사용했으며, 궁전 내부 장식은 매우 호화로우며 사치스러웠다. [[1656년]]에는 총대주교 니콘을 위해 파트리알시 궁전이 건설되었고, 당대 유럽 본토에 비하여 뒤떨어졌던 러시아의 재정 수준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표트르 1세]]가 대대적인 서구화 정책을 펴면서, 1712년에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하였고, 이에 따라 모스크바의 중요성이 하락하면서 자연스레 크렘린의 위상도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러시아의 역사적 수도라는 이유로 황제들의 대관식은 여전히 크렘린 내부의 우스펜스키 성당에서 진행하였으나, 이마저도 1773년 이후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황실이 크렘린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어서 [[예카테리나 2세]] 시절인 [[1788년]]에는 여제가 직접 크렘린의 옛 궁궐을 헐고 완전히 새로운 궁전을 지으라고 명하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바실리 바제노프가 설계했던 새로운 궁전은 길이만 630m, 층수는 4층에 달하는 거대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궁전이어서, 이를 위한 부지를 내기 위해서 몇 채의 궁전을 헐어버려야만 했다. 다만 러시아의 열악한 재정은 새 궁전에 들어갈 비용을 버티지 못했고, 공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중단되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새로운 궁전은 마트볘이 카자코프가 재설계한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로 다시 태어났고, 이 것이 바로 현재 러시아 대통령 집무실로 쓰이기도 하는 크렘린 상원궁이다. 한편 1812년에는 러시아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모스크바를 일시적으로 내주면서 크렘린 역시 한시적으로 [[프랑스 제1제국|프랑스]]의 군홧발에 짓밟혔고, [[프랑스군]]이 물러간 이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대대적인 수리를 통하여 파괴된 건물들의 보수 공사를 지시하였다. 이후에도 크렘린에는 꽤나 많은 보수공사가 진행되었으나, 전체적인 구조나 골조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크렘린은 [[러시아 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러시아 전역의 최고 정치 중심지로 급부상하게 된다. [[소비에트]]는 구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부르주아들의 도시'''로 간주하고,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겼으며, 공산당 본부가 크렘린에 위치하면서 크렘린이 다시 러시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소비에트 정부는 [[1918년]]에 모스크바에 입성하였으며, [[블라디미르 레닌]]은 크렘린 내의 상원 궁전을 관저로 삼고 그 곳에 주로 머물렀다. 4년 후, 레닌이 사망하고 소련의 최고지도자로 등극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차르 체제의 유물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크렘린 꼭대기에 있던 [[쌍두독수리]][* 쌍두독수리는 로마노프 황가의 상징이었다] 동상을 철거하고 공산당을 상징하는 붉은별을 걸었으며, 14세기에 지어진 추도프 수도원과 16세기의 성당들은 사관학교와 하원의사당으로 바뀌었다. 구세주 성당, 니콜라이 궁 등 크렘린 내부의 대부분의 건물들도 궁전에서 정치국 회의장이나 집무실 등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참고로 스탈린은 철저한 비밀주의를 고집하였으며, 절대로 크렘린을 외부에 공개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집권한 몇 십년 동안 심지어 모스크바의 시민들조차도 크렘린의 내부 모습을 자세히 알지 못했으며, 크렘린 내부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최고위 공산당 간부들, 그리고 극소수의 외신 기자들 뿐이었다. 이같은 기조가 바뀐 것은 스탈린 사후 집권한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였는데, 탈스탈린화를 부르짖은 흐루쇼프가 개방적인 면모를 과시하기 위하여 일부러 크렘린 내부를 외부에 공개하였던 것이다. 흐루쇼프는 [[레닌 영묘]]에 안장되어 있던 스탈린의 시신을 크렘린 벽 묘지로 이장하여 그의 권위를 실추시켰으며, 1975년에는 크렘린에서 직접 세계청년학생대축전을 개최하면서 전세계의 이목을 크렘린으로 끌기도 했다. 이후 소련은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넨코]] 등을 지나 마침내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시기에 이르렀다. 고르바초프는 갈수록 경직되어가는 소련의 사회에 위기감을 느꼈고, [[페레스트로이카]]로 대표되는 개방정책을 펼치면서 소련 경제 및 사회를 일부라도 자유화하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오히려 소련의 붕괴를 촉진하였으니, 오랫동안 굳어버린 사회에서 살아오던 소련 국민들과 공산당원들에게 외부의 문화는 큰 충격이었고, 외부 문화의 대대적인 유입으로 인하여 개혁파와 보수파들 사이에서 갈등이 더욱 심해졌던 것이다. 결국 소련은 [[8월 쿠데타]]가 일어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유폐되기까지 하는 등 막장으로 치닫다가, 결국 [[1991년]]에 [[소련 해체|소련이 해체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크렘린 외벽에 있던 "СССР"와 소련국장은 철거되고 러시아 국장인 쌍두독수리로 변경되었다. [[소련 해체]] 이후,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 역시 크렘린을 정부의 중심으로 삼았다. 초대 [[러시아 대통령]]으로 취임한 [[보리스 옐친]]도 크렘린에서 집무를 보았고, 이후 러시아의 실세로 군림한 [[블라디미르 푸틴]] 역시 크렘린에서 사무를 처리하고 있다. 현재 크렘린은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모스크바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명성을 날리고 있으며, 한때 [[소련 공산당대회]]나 중앙위원회 회의를 개최하던 크렘린 대궁전은 현재 국제 컨퍼런스장이나 극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2021년]] 전승기념일 기준 성벽 보수공사 중임이 확인되었다. 2023년 5월 3일 우크라이나군의 드론 공격으로 궁전의 일부가 파손되었다고 러시아 측 매체에서 보도했다.[[https://twitter.com/NOELreports/status/1653734700014358538?s=20|#]] 자폭 드론의 항속거리 문제 등의 요소를 고려하면 러시아 내 반정부단체가 벌인 일이라는 추측이 있다.[[https://twitter.com/gerashchenko_en/status/1653743906851266560?s=46&t=fYrSMHn1kRNKlNjY6XP78Q|#]]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