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테시폰 (문단 편집) === 그 이후 === 이란의 황제와 귀족, 관료, 군대는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을 함락시키기 전에 도주했고, 아랍인들은 도시에서 막대한 재물을 노획했다. 아랍 군대는 피난민들이 도시를 떠나는 것을 막지 않았으며, 아랍인들이 메소포타미아를 완전히 장악한 뒤 [[쿠파(도시)|쿠파]], [[바스라]] 등 신도시를 건설하자 그곳으로 인구가 빠져나가기도 하여 크테시폰(상술했듯 아랍인들은 '도시들'이라는 뜻의 알 마다인이라고 불렀다) 일대의 인구는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크테시폰 주위에는 여전히 방대한 농경지와 수리 시설이 산재해 있었으므로, 그것들을 관리하기 위한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잔존하였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 시대까지 크테시폰 주변 지역을 관리하기 위한 총독들이 임명되었으며, 사산 왕조의 구 황궁은 총독 관저로 사용되었다. [[1차 피트나]] 시기 마다인은 주요 전장 중 하나였고, [[하산 빈 알리]]가 이곳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다만 8세기 초엽 우마이야 왕조가 동남쪽 150km에 세운 [[와시트]]가 티그리스 중류의 주요 도시로 성장하며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크테시폰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750년 우마이야 왕조가 [[아바스 왕조]]로 교체된 뒤, 아바스 왕조가 이라크를 중심지로 삼기 위해 크테시폰 바로 근처에 [[바그다드]]를 건설한 이후의 일이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들은 바그다드의 새 궁전에 쓸 자재를 조달하기 위해 크테시폰의 황궁을 철거했고, 바그다드가 완성되고 번영을 누리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인구도 대부분 바그다드 지역으로 옮겨 갔다. 이후 12~13세기까지는 작은 마을 몇 개 정도 수준으로 사람이 살기도 했지만, 14세기 이후 [[몽골 제국]]과 [[티무르]]의 침입으로 이라크 지역이 완전히 쇠퇴하면서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로 전락하였다. 크테시폰 일대에 대한 근대적 발굴 조사는 1928~29년, 1930~31년 [[독일]]-[[미국]]의 합동 조사단에 의하여 처음 실시되었다. 이후 1964년 [[이탈리아]] 조사단이 한 차례 더 조사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대규모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아직 크테시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지지부진한 상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