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라우디우스 (문단 편집) === 주요 분파 === 시조 클라우수스 인솔 아래, 일찍부터 로마로 건너온 클라우디우스 씨족들은 ‘오래된 클라우디우스’ 가문으로 불렸는데, 이들은 로마 일곱 언덕 중 카피톨리노와 아니오에 많이 거주했다. 또 이 씨족 가문은 로마 귀화 당시부터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에 모두 걸쳤기 때문에 특이하게 공화정 시대부터 분파 가문들의 신분이 다양함에도, 모든 지파가 그 전통을 공유, 유지하는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그 예로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뒷머리를 뒷목덜미 아래로 길게 기르는 스타일 역시 클라우디우스 씨족 남성들의 특징 중 하나였다고 하며, 로마로 대규모 이주 후 로마 시민권을 받았을 당시부터 로마 내 일곱 언덕 중 하나인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가문의 가족 공동묘지로 배정받고, 아니아 북부 지역을 가문과 그 일원들의 거주지로 배정받았다고 한다. 상술한 것처럼 하나의 가문이라는 인식이 강한 특징이 있었음에도, 시조 이래 각 출신 인물이 중시조로 일찍 분파 후 귀족 가문 지파와 평민 가문 지파로 나뉘었다. 이중 귀족 신분에 속한 분파 가문으로는 사비누스, 크라수스, 레길렌시스, 켄토, 카이쿠스, 풀케르, 네로 가문 등이 있었다고 하며, 평민 가문으로는 마르켈루스, 아셀루스, 칸니아, 키케로(칼비우스)[* 기원전 453년 호민관에 오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키케로를 배출했는데, 이 사람의 또 다른 코그노멘 표기가 칼비우스였기 때문에 칼비우스 가문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가문 등이 존재했다. 여러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 중 공화정 말까지 존속한 대표 가문으로는 풀케르, 네로, 마르켈루스 가문이 유명했는데, 이 가문 출신 사람들은 결혼, 입양 등을 통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 황실을 구성했다. '''사비누스 가문'''은 오래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원류로, 씨족의 본원이 사비니족에서 따왔던 것을 상징한 종가격의 가문이다. 이 가문의 시작은 시조 아티우스 클라우수스, 즉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사비누스 레길렌시스였으며, 이 시조 일가의 대부분 구성원들이 크라수스라는 이름으로 갈라져 나오기 전까지 사비누스라는 코그노멘으로 유지하며 애용했다. 따라서 고대 로마의 씨족 연구를 한 학자들은 클라우디우스 씨족이 au와 o를 병기표기했던 것과 사비누스 가문을 종가로 여긴 전통을 가리켜, 이들이 로마에 귀순, 귀화해 로마인이 된 이후에도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했던 예로 언급하고 있다. '''레길렌시스 가문'''은 오래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또 다른 핵심 분파로, 또 다른 고대 로마의 오래된 씨족 포스투미우스 일가도 함께 소유한 코그노멘이었다. 이 어원은 클라우디우스 씨족들이 거주했었던 사비니 정착촌 레길리움[* 정확히 이탈리아의 어느 곳에 위치한 마을인지 확실하지 않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크라수스 가문'''은 사비누스 가문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지파로, 사비누스 가문이 대체 사용한 코그노멘이었다. 그리고 이 가문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집안이 클라우디우스 씨족 내 귀족 지파들의 원류 '''카이쿠스 가문'''이다. 카이쿠스 가문은 가이우스의 아들 장님 아피우스에서 시작됐고, 그 장남인 기원전 268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루수스]]가 이었다. 그러나 루수스는 뒤를 이을 아들을 남기지 못했고, 조카 중 한명을 입양하지도 않아 그 대는 일찌감치 끊긴다. '''풀케르 가문'''은 아피아 가도의 건설자인 아피우스 카이쿠스('장님')의 차남 푸블리우스로부터, '''켄토 가문'''은 3남 가이우스로부터, '''네로 가문'''은 4남 티베리우스를 중시조로 이어지는 가문이다. 아피우스 카이쿠스 이전에는 '사비누스'('사비니 출신'), '크라수스'('뚱보' 또는 '멍청이', '눈치없는 답답이') 등의 가문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사비누스=크라수스=카이쿠스=풀케르=켄토"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차남에서 분가된 풀케르 가문은 루수스, 켄토 가문과 달리 카이쿠스 아들 중 가장 번성해 따로 봤고 실제로도 풀케르 가문 사람들은 첫 풀케르 별칭을 쓴 푸블리우스를 자신들의 중시조로 여겼다. 풀케르 가문은 차남 푸블리우스가 맨처음 코그노멘으로 자신의 별칭 "풀케르(잘생긴)"를 개인 코그노멘으로 삼고 시작됐다. 가문 전체 역사상 가장 융성한 분파 가문답게, 공화정 역사상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 전체를 상징한 집안이다. 시조 아피우스의 개인이름을 푸블리우스, 가이우스, 티베리우스와 돌려가며 애용했고, 클라우디우스 가문 종가 특유의 AV(au), O(o)를 병기표기해 클라우디우스/클로디우스를 병기 사용했다. 처음으로 풀케르를 코그노멘으로 사용한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249년 집정관을 지냈고, 그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212년 집정관을 지내고 2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해 [[한니발]]에 맞서 로마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다가 피투성이가 돼 장렬하게 전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명성과 위엄 모두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두번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여동생 클라우디아, 남동생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귀부인, 해군제독 신분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후손 중 한명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가 선동정치가로 여러 번에 걸쳐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클라우디우스 가문 전체의 평판을 "거만하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꼰대" 등으로 알려 체면을 구겼다. 그렇지만 이 가문은 물의를 일으킨 인물들을 배출했음에도 다른 가문원들은 제 역할을 다해 그 위세가 대단했다. 더욱이 풀케르 가문은 손도 꾸준히 넉넉해 차남, 삼남을 리비우스, 발레리우스 가문에 입양보냈다. 풀케르 가문은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당주였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아우구스투스의 정적으로, 간통죄 혐의를 뒤집어쓰고 숙청되면서 그 위세가 제정 성립 이후 크게 꺾여 몰락귀족으로 전락한다. 그럼에도 3세기, 이 가문의 외손 [[푸피에누스]]가 이 가문의 이름을 이어 원로원 고위직을 차지하고 제위까지 오르며, 그 외조부 아피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이름을 아주 잠시나마 세간에 다시 알릴 수 있었다. '''켄토 가문'''은 카이쿠스의 삼남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를 중시조로 하여 분가한 가문이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루수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동생이나, 분가 이래 중시조 가이우스는 두 형, 동생보다 훨씬 잘 나갔고 이 사람의 도움 아래 원로원에 들어온 평민귀족들도 많아 명성이 대단했다. 그는 부친 카이쿠스처럼 집정관, 감찰관 등을 지냈고, [[대 그라쿠스]] 삼촌의 추천으로 기원전 213년 독재관까지 지냈다. 허나 이 가문은 가이우스 이후 장군, 총독, 제독을 배출했음에도 첫 켄토인 가이우스에 버금가는 대단한 사람을 배출하지 못했고, 기원전 1세기 이후 로마 관보에서 가문의 코그노멘은 보이지 않는다. '''네로 가문'''은 분가한 중시조 티베리우스 때부터 바로 위의 세 형과 달리 집정관을 배출하지 못했다. 사비니어로 "용감한 자", "과감한 자", "활기찬 자"를 뜻했음에도 이 가문은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활약한 집정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외에는, 법무관 또는 일반 원로원 의원만 배출했던 집안이었다. 첫 네로인 티베리우스는 유일하게 카이쿠스 아들 중 집정관에 오르지 못했고, 다른 선출직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는 이 사람의 장남 티베리우스도, 차남 푸블리우스도 비슷했다. 그러나 이 가문은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를 통해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결합,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이라는 형태로 완성되면서, 어떤 클라우디우스 가문보다 가공할 만한 힘을 갖고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긴다. 왜냐하면 네로 가문은 로마 제정 최초의 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구성해 아우구스투스 다음의 세 황제를 배출하고, 한명을 입양해 두 명의 황제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로 '''네로 게르마니쿠스 가문'''인데 그 시조는 [[대 드루수스]]이다. 그러나 네로 가문과 네로 게르마니쿠스 가문은 나눌 필요가 없는 상태였고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로마인들에게 그들은 '''카이사르 가문'''이라고도 불렸다. 이 가문에 속한 남성으로는 제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와 그 양자이자 후계자인 제5대 황제인 네로[* 원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있으며,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 역시 본래는 이 가문 남성이다. '''마르켈루스 가문'''은 풀케르 가문 못지 않게 위세가 대단했던 지파였지만, 평민에 속했다. 코그노멘의 어원이 마르쿠스에서 따왔던 만큼, 지파의 시조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라는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용장 마르켈루스를 비롯한 가문 내 남성들은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애용하고 이를 대를 이어 물려줬다. '''키케로 가문'''은 호민관 클라우디우스 키케로를 배출한 또 다른 평민 지파로, 칼비우스 가문으로도 이용한 것이 확인되므로 칼비우스 가문으로 해석되는 경우도 많다. 참고로 이 집안은 우리가 흔히 아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는 전혀 관계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