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론(가수) (문단 편집) === 데뷔 후 === 김창환의 구원투수가 된 클론[* 그룹 이름 '클론'은 유전학 용어로, 유전자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복제인간을 뜻한다. 멤버 두 사람이 한 몸처럼 춤과 댄스를 구사한다는 의미로 붙은 이름.[[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60100209117008&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06-01&officeId=00020&pageNo=17&printNo=23212&publishType=00010|#]] 다만 철자는 e가 빠져서 원래 클론 철자와는 다르다.]은 '[[꿍따리 샤바라]]'로 데뷔했다. [[1996년]]은 당대 최고의 가수인 [[솔리드]], [[R.ef]], [[신승훈]], [[김건모]]가 컴백해서 활동하던 시기였으며 이들 모두가 음반을 발매하자마자 한 달도 안 되어 1위 후보에 오를 만큼 정말 각축전이 심한 시기.[* 다만, R.ef의 1집은 대부분 표절곡이다. 1집에 실린 고요속의 외침은 일본 곡, 상심은 벨기에 곡을 표절했다. 작곡가 홍재선은 R.ef뿐만 아니라 [[표절/공식 판정#s-2.1|룰라 3집 '천상유애'로 크게 터뜨렸다.]]] 나머지 곡들도 꽤 오랫동안 순위권에 머물 정도로 명곡들이 많았다.[* 1996년 상반기 가요계는 1995년 9~12월에 쏟아진 명곡들이 1위 곡을 비롯한 10위권을 점령했으며 1995년 10월에 나온 음악이 1996년 6월에도 10위권 안에 있던 걸 감안하면 이 당시는 크게 롱런한 곡이 많았다는 뜻. 1996년 1월 3일부터 5월 1일까지 1위를 차지했던 곡은 모두 1995년에 발표한 곡.] 강원래와 구준엽은 공식 데뷔만 늦을 뿐, 활동한지는 이미 10년이 지난 중고 신인이고 기성 가수들과 활동한 경험이 많아 능수능란하게 적응을 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제작사에서는 앨범 발매 전부터 미리 클럽 등지에 데모 테입의 형태로 꿍따리 샤바라를 배포해 두면서 크게 홍보를 한 결과 이들은 앨범을 발매한지 1달도 안 되어 각 방송사의 1위 후보에 올랐다. 이들은 이 기세를 몰아서 당대 최고의 가요프로 [[가요톱10]]에서 김건모가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던 [[솔리드]], [[R.ef]], [[신승훈]] 등과의 경쟁을 뚫고 '스피드'로 4주 연속 1위를 한 다음 대망의 골든컵에 도전할 때 그 기록을 저지하고 새로운 최강자로 우뚝 서게 되었으며 그 날 이들은 가요톱10 첫 1위가 확정되자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김건모가 4주 연속 1위를 했을 때에는 9표차 접전을 펼칠 정도였다.] 이 날 김건모는 바로 전년도까지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라인음향 소속의 클론이 1위를 할 때 축하를 했지만 속으로는 아쉬움을 참아내는 기색이 역력했다.[* 만약 김건모의 '스피드'가 골든컵 수상에 성공했다면 [[조용필]]에 이어서 4년 연속 골든컵, 정규앨범 4장 연속 골든컵 수상곡 배출로 신승훈, [[서태지와 아이들]]도 달성하지 못한 대기록을 수립했을 상황이라, 친한 후배인 클론의 1위를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구준엽이 훗날 술회하기를 김건모와 클론은 원래 친했으나 김건모가 김창환과의 불화로 인해 회사를 나가면서 김건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1위 발표 후 같이 얼싸안을 때 구준엽은 김건모의 몸에 손도 안 댔다고 한다. 당시 자료화면을 보면서 그 당시는 너무 어려서 저런 행동을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뒤 이들은 그 여세를 몰아 '꿍따리 샤바라'로 다른 경쟁작인 룰라의 '[[3!4!]]'와 DJ DOC의 '여름 이야기'와의 경쟁 끝에 '''골든컵의 주인이 되었으며''' 1집의 후속곡인 <난>도 1위 후보에 오르면서 입지를 탄탄히 다졌고, 삼속곡으로는 <영화처럼>을 짧게 선보였다. 높은 인기를 증명하듯이 1996년에 개최된 SBS 스타상과 [[서울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 특히 이 해에는 치열한 대접전으로 인해 가요톱텐에서 <쿵따리 샤바라>와 같이 골든컵을 수상한 곡은 김정민의 <슬픈 언약식>이 유일하며 1996년 발매 곡으로는 쿨의 <운명>이 유일하다.] 1집의 기세를 이어서 1997년 6월에는 2집인 여름 바캉스 곡인 <도시탈출>을 선보였을 때[* [[가요톱10]]에서 이 곡을 처음 선보였을 때 강원래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3부 반바지'''를 입고 나왔다.] 반응은 기획 단계부터 1집의 성공을 너무 크게 의식한 나머지 <쿵따리 샤바라>의 아류작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평가를 떠나 제작자의 앨범 홍보 방향부터가 대놓고 '쿵따리 샤바라 2'였다. 심지어 도시탈출 뮤직비디오 로고에 부제를 대놓고 '쿵따리 샤바라 2'라 칭하기도. 이와 같은 전략을 통해 [[소포모어 징크스|안전주의적인 선택으로 적당한 인기를 얻긴 했으나, 방송 3사에서 골든컵을 비롯해 각종 1위를 쓸어남았던 전년도의 열풍에는 훨씬 못 미치는 인기였다.]] 그래도 슈퍼루키 시절의 인기를 통해 여러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 후보에 상당수 진입한 바 있으며 후속곡인 발라드 풍의 '빙빙빙'도 10위권 내를 유지하면서 선전했다. 음반 판매량이 1집의 밀리언 셀러에서 수직으로 하락해 20만장 대에 그치긴 했지만, 다행히 클론이 기존에 보여준 카리스마있는 이미지와 세련된 비트, 친근한 멜로디 등등의 음악적인 이미지와 컨셉은 그대로 이어갔기 때문에 2집이 부진했던 것에 비하자면 브랜드 파워는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또한 1집의 인기가 워낙 컸기 때문에 2집이 상대적으로 부진하긴 했지만 절대적인 인기가 부족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또한 이 무렵부터 한류 열풍에 슬슬 불을 지피면서 당시에 대만 쪽으로 프로모션을 하게 되어 가수로서, 연예인으로서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약 1년 반의 공백기를 가진 후 1999년 3월 27일 3집을 발매했다. 두 멤버 모두 강렬한 랩핑과 낮은 음역대의 허스키 보이스를 가지고 있어 기존 멤버들만으로는 음악적인 변화를 꾀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그러한 이유로 파워풀한 가창력을 지닌 객원멤버 [[김태영]]과 함께 활동했다. 테크노 리듬과 펑키 리듬을 접목한 [[https://youtu.be/7OLe6jeD9LI|<돌아와>]]를 통해 2집의 부진을 어느 정도 만회했고 이를 통해 한국에서의 하락세를 반등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외에도 , Nazareno(1975)의 O.S.T인 When a child is born을 리메이크한 <사랑과 영혼> 등을 통해 앨범 활동을 이어갔으며, 두 곡 모두 이전 활동곡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린 비트와 레트로 느낌의 멜로디를 접목하여 음악적인 다양화를 기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 대만에서의 인기가 본격적으로 터지면서 [[H.O.T.]], [[NRG(아이돌)|NRG]]와 함께 '''중화권 한류 1세대'''로 상징적인 인기를 누렸다. 대만 등 중화권은 1990년대 말 한류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까지 여리여리하고 부드러운 이미지 혹은 비주얼 락계의 짙은 화장과 화려한 헤어스타일이 일반적이었던 J-POP이 대세였는데, K-POP 스타일이 이들과 크게 차별화되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것이 곧 한류로 발전했다. 특히 클론이 내세운 강렬하고 남성적인 댄스 퍼포먼스가 신선하게 다가온 점이 주효했다. 3집에서의 반등 및 한류 열풍의 시발점으로 롱런의 기반을 다진 이후, 2000년 4월 4일에 4집 앨범을 발매했다. 당시 유행하던 테크노를 적극적으로 접목시켜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비트로 승부한 <초련 Techno Mix>는 기존의 클론 이미지와 아주 잘 부합하면서 대중적으로 부담없이 다가오는 곡이었고, 결국 나이트클럽 및 레크리에이션계를 섭렵하며 2, 3집보다 훨씬 많은 인기를 끌어 완벽하게 정상의 자리로 다시 올라섰다. 참고로 <초련 Original Mix>도 같은 정규 앨범에 수록되었는데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오락실 발판형 [[리듬 게임]]인 [[펌프 잇 업]]에 수록되면서 리듬 게임 유저층 위주로 알려지긴 했다. [[KBS]] [[뮤직뱅크]]에서 무려 4주 1위, [[MBC]] [[음악캠프]]에서도 1위를 차지하면서 4년만에 다시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후속곡인 <거짓말> 역시 10위 권에 안에 드는 등 선전했다. 색상 반전으로 인한 충격과 야광봉 퍼포먼스의 손목 돌리기가 큰 이목을 끌며 유행을 탔고, 20대 나이트 시장을 정확히 타켓팅한 것이 주요한 성공 이유 중 하나였다. 초련의 대성공으로 음반판매량 역시 3집 27만 장을 훌쩍 뛰어넘는 41만 장의 판매량을 올렸다. 밀리언 셀러를 기록한 최전성기 1집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갈 만한 위상을 찾아올 수 있었고, 해외발 인기를 감안하면 1집 이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수준에 도달하면서 인기 가수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