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키르기스스탄/역사 (문단 편집) == 근대 == 키르기스인들은 주변 무슬림 민족들과 생계 방식이 달랐다. 동쪽의 [[위구르인]]들과 서쪽이 [[우즈베크인]]들은 농경을 주로 하였고, 남쪽의 타지크인들과 파미르인들은 반농반목 경제였다. 북쪽에 이웃한 카자흐인들은 대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한 것과 다르게 키르기스인들은 고산 삼림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유지하였다. 근대 카자흐 유목민들이 러시아에서 내려온 [[타타르]] 무슬림들의 영향으로 급속히 근대화될 당시에도 키르기스인들은 전근대 그대로의 유목 생활을 유지하였다. 1864년 [[위구르|신강]]의 [[무슬림]] 봉기 시기에도 많은 키르기스인들이 휘말렸는데 [[카슈가르]] 지역에서 키르기스의 [[수령#s-3|수령]] 시디크와 [[둥간족|퉁간(Tungan)]][* 당시 신강 지역에 있었던 [[후이족|한회]](漢回), 즉 무슬림화된 한족(漢族)이다. 현대에는 둥간(Dunga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지방에서 집단을 이루어살고 있다.]들이 연합하여 봉기한 후 [[코칸트]]에서 백산당계 호자 부주르그를 초치하였다. 이후 얼마 안가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던 [[러시아 제국]]에 코칸드 칸국을 비롯한 키르기스스탄 전역을 점령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여세를 몰아 위구르인 봉기가 일어난 신장 지역의 동부 영토 상당부분을 병합하였고, 1881년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 사이에 체결된 상트 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해당 지역의 영유권을 인정받는다. 이를 통해 과거 [[야쿱 벡]] 정권 이전 청에 귀속되었던 키르기스인 상당수가 러시아 제국에 귀속되었다. 1858년 러시아 군대에서 복무하던 [[쇼칸 왈리카노프]]라는 이름의 카자흐인 장교는 키르기스 부족민들로부터 키르기스인들의 구전 역사 서사시인 『마나스』를 듣고 기록하여 러시아어로 번역해 출간했다. 왈리카노프는 서구식 교육을 받고 이슬람에서 배교했지만 이슬람을 배교한 사실과는 별개로 [[범튀르크주의]]와 카자흐 민족주의에 심취한 사람이었고,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구전 문학을 발굴하고 알리는 일에 적극적이던 사람이다. 쇼한 왈리카노프는 듣보잡 카자흐인 군인이 아니라 나름 도스토예프스키와도 친분이 있던 유명 인사였고, 그의 소식이 알려지자 러시아 제국의 민속학자들은 곧 공책을 들고, 그리고 소련 시대의 민속학자들은 녹음기를 들고 키르기스인들의 마을을 찾아다니며 마나스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키르기스의 마나스 낭독자들이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관중들 앞에서 마나스를 암송하면서, 키르기스인들에게 부족의 가치를 확인시켜줌과 동시에 용맹과 도덕성을 교육하는 역할도 맡았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여담으로 과거 러시아에서는 [[카자크]]와 [[카자흐]]를 쉽게 구분하기 위해서, 카자흐인들을 키르기스라고 부르던 편이었는데 이 때문에 역사 기록에 나오는 키르기스가 카자흐인을 지칭하는 단어인지 키르기스인들을 지칭하는 단어인지 혼동하기 쉽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카자흐인들을 "키르기스 카자흐"라고 지칭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