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킬링필드 (문단 편집) == 학살 규모 == 폴 포트의 정권의 손에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오늘날에도 정확한 수치를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미국의 폭격 및 내전에서 제대로 피해자 규모도 통계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교도소들은 공로를 부풀리기 위해서 위험 분자를 제거했다고 사망자를 일부러 더 많이 기록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록으로는 처형되었다고 하지만 막상 베트남군이 몰려와서 해방된 수용소에서 살아 있던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반대로 처형 기록이 전혀 없음에도 시체조차도 찾지 못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상당수 기록도 파기되었고 남은 기록도 워낙에 엉망인 상황에서 정확한 사망자 파악은 이뤄지지 못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베트남의 괴뢰국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크메르 루주에 의하여 330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발표했으며, 베트남도 그렇게 주장하였지만 이는 과장된 것이다. 초기에는 유엔과 유니세프도 300만 명 정도가 학살되었다고 추정했는데, 국가 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였던 캄보디아에서 신뢰할 만한 통계를 찾는 건 불가능했고, 가능했던 것은 태국 일대의 난민수용소에서 사망율을 추산한 뒤 인구에 대입하는 [[표본조사]] 방법 뿐이었다. 하지만 사실 피난민들은 일반 국민들보다 훨씬 높은 사망율을 보였다.(당연히 도망친 사람들이 훨씬 상황이 심각했을 것이니까.) 현재 연구에 따르면 킬링필드 치하에서 사망자는 200만 명에서 플러스 마이너스 50만 명 정도로 수렴되고 있다. 캄보디아 문서 센터가 '''발굴한 학살 매장지는 23,000여 곳'''이며, '''확인된 유해만 130만 명'''이 넘는다. 매장되지 않고 유기된 시체까지 포함하면 대략 '''200만 명 내외'''로 추정되며, 처형뿐만 아니라 강제 노동으로 인한 과로사, 굶주림과 질병으로도 많이 죽었다고 한다.[[https://www.mekong.net/cambodia/deaths.htm|연구방법.]] 폴 포트 치하에서 직접 처형된 인원수는 학살의 희생자 수의 60%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나머지는 굶주림과 질병 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캄보디아 전범재판에서는 최소 '''17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판결했으며, 키우 삼판은 자신들이 집권할 적에 10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고 폴 포트는 80만 명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캄보디아 전범재판의 추정치를 받아들인다면, 캄보디아에서는 4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국민들 중 무려 '''25.3%''', 즉 4명 중 1명이 사망했다는 결과가 나온다. 미국의 역사학자 벤 키에넌(Ben Kiernen, 1953~)은 '새 사람'의 29%와 '옛 사람'의 16%가 킬링필드로 죽었다고 추산했다. 그리고 [[세계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1975년에 672.8만 명이던 캄보디아의 인구가 1979년에는 605.2만 명으로, 이전의 10% 정도가 줄었고, 킬링필드가 1979년 시작 직후에 끝났다는 것을 감안하여 1978년 인구(596.1만 명)를 기준으로 놔도 단 3년 만에 이전의 '''11.4%'''가 감소한 셈이라고 볼 수 있다.[* 킬링필드를 제외하면 외침, 자연적인 기근 없이 자국 인구 손실 비율이 킬링필드보다 더했던 사례는 전대의 [[라나발로나 1세]] 시기의 [[메리나 왕국]], 동시기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시기의 [[적도 기니]] 정도밖에 없다. 참고로 이들은 집권할 동안 각각 '6년 만에 내전으로 인구의 50% 감축/10년 동안 전란 하나 없이 인구의 25% 감축'이라는 초유의 기록을 세웠으며(참고로 응게마 시기 적도 기니의 인구 손실 비율은 무려 '''50~75%'''에 달한다.), 특히 응게마는 별명이 '아프리카의 폴 포트'였던 데다가 폴 포트와 유사한 [[반지성주의]] 및 종교 탄압 정책을 벌인 인물이었다.] 이런 마당이었으니 "킬링필드 당시 생존한 사람들 중 4촌 안에 있는 친척이 죽지 않은 경우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면 말 다했다. 사망자의 수와 사인은 지역에 따라 어느 정도 상이한 결과를 보였는데, 크메르 루주의 권력 중심지 중 하나였던 캄보디아의 남서부 지역은 처형이 비교적 드물었고 '새 사람'도 크메르 루주에 협조하면 박해를 면제하는 등 비교적 온건한 통치가 이루어졌으나 크메르 루주 간부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줄 쌀을 모두 프놈펜으로 보냈던 서부 지역과 북서부 지역은 기아로 사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북부 지역과 중부 지역에서는 아사한 사람들보다 처형된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하며, 캄보디아를 넘어 전체 동남아에서도 가장 고립되고 낙후된 지역 중 하나인 북동부 지역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신뢰성이 있는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