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킬링필드 (문단 편집) == [[크메르 루주]]의 집단 학살 == >'''우리는 오래된 풀을 태우고 새 풀이 자랄 것입니다.''' >---- >[[폴 포트]] >'''우리의 이야기를 쓰려면 잉크의 강이 필요합니다.''' >---- >크메르 루주 치하를 보낸 한 할아버지의 회상. [[https://archive.nytimes.com/www.nytimes.com/books/first/p/pran-cambodia.html?scp=86&sq=children%2520of%2520men&st=cse|출처]] 그러나 1976년에 크메르 루주는 시아누크 국왕에게 온갖 혐의를 씌워 가택 연금을 시켰고[* 그나마 자신들이 집권하는 데 시아누크의 공이 컸던 것만큼은 인정해서 죽이지는 않았다.]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농업의 붕괴로 실업과 식량난에 처한 사람들이 수도에 몰려들었으나 전부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고 [[반미]] 노선으로인해 미국의 식량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크메르 루주는 경제 성장과 식량난을 곧 극복하겠다는 말로 이들을 달래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당시 크메르 루주는 [[마오이즘]]을 추종하여 폴 포트 본인이 마오쩌둥의 [[https://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conversation-record-chairman-mao-zedongs-meeting-pol-pot-secretary-central-committee|인민 전쟁에 영감을 받았다는]] 발언을 몇 번 하기도 했다. 크메르 루주는 바로 [[문화대혁명]]식 농촌 강제 이주를 결심했다. 그런데 이 결정은 수천년 역사의 고국을 초기화시켜버린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보다도 더욱 가혹했었다.[* [[공산주의]]를 모르더라도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생산수단의 양질적 측면이 사회 진보를 추동하는 하부요인이라는 건 마르크스 책 한 권만 봐도 알 수 있다. 스스로 공산주의 이론가이기도 했던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 와중에도 자신이 직접 설립에 서명한 [[중국과학원]]에는 홍위병들이 절대 손을 못 대게 했고(흥분한 홍위병들이 마오의 명령조차 무시하고 몇 과학자들에게 위해를 가한 사례는 있었다. 여하간 피해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그나마 피해가 덜한 분야 중 하나였다.) 마오의 또 다른 대표적 실책으로 평가되는 [[대약진 운동]]도 사실 공업화를 잘 추진해 보려다가 의도와는 다르게 대차게 실패한 것이다. 물론 공업화에 대해서 일자무식이던 당시 중국공산당 상층부가 진행한 [[대약진 운동]]도 인류 역사에 남을 정도로 멍청한 정책 중 하나로 꼽히지만 적어도 크메르 루주처럼 공업화와 기술은 모두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부정해야 한다는 정신나간 논리는 펼친 적이 없다. 그리고 스탈린주의는 한술 더 떠서 대놓고 공업화를 추구하였다. 공산주의에 문제점이 많지만 그래도 저들은 공업화라도 시도해서 성공적인 국가 경영을 꾀하기도 했는데 폴 포트는 그냥 고의적으로 나라를 망친 것이다. [[폴 포트]]의 조악한 공산주의 이해도와 크메르 루주 특유의 잔혹함이 얼마나 [[반지성주의]]적인지 알 수 있는 대목.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사람이 더 빨리 달리기 위해 두 다리를 잘라버려야한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다. 그러니 다른 독재자들을 두둔하는 공산주의자들마저 폴 포트만큼은 사실상의 [[반공주의자]]로 [[지능형 안티|취급할 수밖에 없는 거다.]]--] 이 전대미문의 대악행 중의 대악행을 저지른 크메르 루주의 수장 [[폴 포트]]는 프랑스 유학 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일종의 열성 엘리트로서 지식과 학력은 높았으나 사회 운영이나 갈등 조정에 관한 [[지혜]]가 부족했다. 게다가 [[가치관]]도 상당히 잘못되어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처음에는 시아누크가 복귀하면 사회가 안정화될 것이라며 환영했던 민심이 괴상한 정책의 시행으로 떠나가기 시작하자 폴 포트는 더욱 추잡한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폴 포트는 '[[전체주의|'''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는 이른바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 정책을 펼쳤는데 이런 추악한 마음가짐으로 자국민들을 학살하던 폴 포트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1977년 9월 "혁명에 반대하는 전체 인구의 1~2%만이 제거됐다"고 주장하며 학살을 조장하고자 했으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1978년에는 캄보디아 인구의 20~30%가 여전히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국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후술할 극단적인 통제들을 일부 완화했으며[* 이때 수렵활동과 가족끼리 개별적인 식사를 허용하고 여러 가지 색으로 된 옷을 입어도 좋다는 조치를 시행하기도 했으며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차별 정책을 폐지했고 '옛 사람'과 '새 사람'의 결혼을 허용했으며 전국민의 정치활동 참여권, 심지어 한 달에 세 번씩 종려당으로 단맛을 낸 쌀죽을 먹는 '후식 먹는 날'을 제공하려고 했다. 물론 이 정책들은 지방 간부들의 재량에 따라 시행하는 것으로 결정된 데다 결정적으로 이 조치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더욱 나빠져 완전히 [[전시행정]]이 되었다.] 사형도 '당과 혁명, 인민에게 절대적으로 적대적인 자들'이나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대상'으로 한정지어 임의적인 처형을 줄이고자 했으며 지방에 하방된 귀국 유학생들을 프놈펜으로 보냈고 공장들에서는 '부르주아의 상징'으로 간주되던 전문기술 교육을 재개하게 되었고 심지어 '''외무부 간부들을 양성하기 위한 외국어와 비서 관련 업무 교육과 국립공업전문대학 신설(!)까지 실시되었다.''' 물론 폴 포트는 자신의 정책 실패의 원인을 정책 그 자체의 문제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도부에 [[배신자]]나 [[스파이]]가 숨어 '파괴활동'을 자행해서 그럴 거라고 믿었으며 이로 인해 그와 동시에 집권 이래 최대의 숙청 작업도 진행되어서 이때에도 수만 명이 처형당한 것은 물론이고[* 이는 '중앙에서 결정된 숙청'은 계속 실시했기 때문이다.] 폴 포트가 집권할 당시 22명에 달하던 공산당 중앙위원회 의원이 폴 포트가 축출될 무렵에는 단 4명만 살아남았다. 심지어 [[베트남]]과 국경을 맞댔으며 베트남과 밀접한 연관을 맺은 간부들이 우세했던 데다 친베트남 성향이었던 캄보디아 동부 지역에서는 폴 포트가 '너무 온건하다'고 생각한 동부 지역의 간부들에 대해 당 중앙군을 동원해 동부 지역을 침공해 가면서까지 당, 군대 및 인민 모두에 대한 대규모 무차별 숙청을 가했고 이에 따라 단 6개월 만에 동부 지역에 살던 약 150만 명 중 무려 25만 명이 사망했다. 이는 폴 포트 정권 하에 있던 모든 학살 중 가장 심각했다고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탈출한 간부들 중 일부는 베트남으로 피신했고[* 이들 중 한 명인 [[훈 센]]은 베트남이 후원하는 반군의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고 [[1985년]]에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수상이 되어 집권 중이다.] 일부는 다른 지역에서 또다시 학살을 저질렀다. 하술할 내용들을 보면 알겠지만 폴 포트의 악행들은 문자 그대로 '''사실상 전국민을 [[정치범수용소/북한|북한의 정치범수용소]] 혁명화구역에 강제 입소시킨 것과 똑같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