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란토 (문단 편집) ==== 로마와의 대립 ([[피로스 전쟁]]) ==== 기원전 290년, 로마는 기나긴 전쟁 끝에 [[삼니움]]족을 굴복시켰고,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폴리스들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레기온, 로크리, 크로토네 등이 로마에 자발적으로 보호를 요청하였고 기원전 282년에는 타란토의 지배 하에 있던 타란토 만의 도시 투릴이 루카니아인의 위협을 덜고자 로마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루키우스 발레리우스가 이끄는 로마 함대가 타란토 만을 가로질러 투릴에 정박하였고, 타란토인들은 마그나 그라키아의 패권을 행사하던 자신들에 대한 도전이라 여겼다. 타란토 함대는 즉각 출동하여 10척 중 4척의 로마 함선을 침몰시켰고 5척을 나포하였다. 이후 타란토 함대는 투릴로 진격하여 로마군과 그에 협조하던 귀족들을 추방하였다. (구 기득권 층의 귀족들은 민주정을 주도하는 민중당에 맞서 친로마적 태도를 보였다.) 이후, 로마는 집정관 포스투미우스을 포함한 사절단을 파견하였으나 타란토 대표들에게 모욕을 당한 후 돌아왔고, 이에 로마는 타란토에 선전포고 하였다. (기원전 281년) 그러자 타란토는 명성이 자자하던 명장인 에페이로스 국왕 [[피로스 1세]]에게 지원을 부탁하였다. 피로스군이 도착하기 전,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가 이끄는 로마군은 타란토를 함락, 약탈하였고 타란토-삼니움 연합군도 로마군에 패하였다. 이후 타란토는 로마와 휴전 협상을 하였는데, 그 사이에 3천 명의 에페이로스 선발대가 타란토에 입항하였고 이에 로마 군은 후퇴하였는데, 중간에 그리스 전함들의 공격으로 손실을 입었다. 피로스 1세는 타란토 해군이 자신의 코르키라 ([[코르푸]] 섬) 정복에 도움을 주었기에 타란토를 돕기로 하였다. 그는 이후 시칠리아, 카르타고까지 정벌하여 마케도니아를 통일할 군자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그는 당시 마케도니아 왕이던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팔랑크스를,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1세와 테살리아에서 기회를 노리던 안티고노스 2세에게 해군과 자금을 빌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9천 명의 병력과 5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보낼 것을 약속하였다. 그 병력은 피로스의 원정 기간에 에페이로스를 지킬 것이다. 기원전 280년 봄, 피로스는 2만 명의 팔랑크스 보병대와 3천 기병대, 2천 궁병, 250명의 투석병, 20마리의 코끼리를 대동하고 이탈리아에 상륙하였다. [[피로스 전쟁]](BC 280 - 275년)의 시작이었다. 피로스의 상륙 이후 로마군은 8만 병력 중 4만 명을 남하시켰고 피로스의 3만 대군과 타란토에서 서쪽 50여km 떨어진 헤라클레아에서 싸웠다. [[피로스의 승리|비록 피로스는 승리하였지만 4천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어]] (로마는 7천 전사) 이전까지 과소평가하던 로마군에게 놀라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피로스는 카푸아와 베네벤툼 등 로마의 동맹시들을 포섭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아풀리아로 돌아왔다. 기원전 279년, 아스쿨룸 전투에서 피로스는 재차 승리하였으나 3500명의 병사를 잃었다. (로마군은 6천 전사) 베테랑 정예병들이 죽는 것을 보고 회의감을 느낀 피로스는 시라쿠사, 아그리겐툼 등 시칠리아의 도시들이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도움을 요청하자 타란토에 수비대를 남기고 시칠리아로 가서 싸웠다. (기원전 278 ~ 276년, 277년의 에릭스 전투) 기원전 276년, 타란토인들은 피로스를 재차 소환하였고 이듬해인 기원전 275년에 베네벤툼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그는 로마군과 같은 피해를 보았고,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사후 켈트족을 격퇴하고 마케도니아의 왕이 된 안티고노스 2세가 원군 파병을 거절하자 피로스는 더이상 전쟁을 치를 수 없다고 판단, 수비대를 남기고 에페이로스로 돌아갔다. 이후 피로스는 아오스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을 격파하고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기원전 272년, 그는 스파르타에서 쫓겨난 왕 클레오메네스의 복위를 도와 스파르타를 포위하였으나 저항이 심하여 애를 먹었고, 퇴각 중 장남 프톨레마이오스를 잃었다. 상심한 그는 아르고스의 내전에 개입, 시가전을 벌이다가 아르고스인들의 저항이 심해 퇴각하려고 했는데 전령이 삼남 헬레누스에게 명령을 잘못 전해 피로스는 퇴각하고 헬레누스는 진군하면서 부대가 뒤엉키자 혼란속에 헬레누스와 함께 죽었다. 한 마케도니아 병사가 그를 효수하였고 시신은 복위한 안티고노스 2세에 의해 화장되었다. 피로스의 사망 소식에 타란토의 그리스 병사들은 로마에 항복하였다. 도시에 입성한 로마군은 성벽을 허물고 시민 3만 명을 노예로 팔고, 예술품들을 전리품으로 삼아 로마에 가져갔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빛나던 항구 도시의 몰락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