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르수스 (문단 편집) ==== 아미르 야자만 ====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임명한 타르수스 총독 칼라프 알 파르가니는 전직 총독과 그 부하들을 감금하였다. 그러나 압바스 조의 병영도시였던 타르수스의 시민들은 그에 반발하였고 감금된 총독의 부하 야자만 알 카딤을 석방시킨 후 봉기하였다. 이에 툴룬이 직접 정벌군을 이끌고 왔으나 시민들이 댐을 무너뜨려 수공을 펴자 후퇴하였다. (882년 가을) 이로써 타르수스는 이미 총독이 동전을 주조할만큼 자치권이 보장되긴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3년만에 압바스 조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사태를 지켜보던 동로마 제국은 이를 기회로 타르수스 수복에 나섰다. 883년 늦여름, 스콜라이 연대장 케스타 스티페이오테스가 이끄는 동로마 군대가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도시에서 12km 떨어진 밥 칼라미야에 진을 쳤다. 야자만은 이들을 습격하기로 하였고 9월 11일 밤, 실행에 옮겼다. 상승세였던 동로마 군대는 얕잡아 보던 아랍인들에게 불의의 습격을 당하자 진열이 붕괴되었고 사령관 케스타는 물론이고 아나톨리콘 테마와 카파도키아 테마의 스트라테고이까지 전사하였다. 자신감을 얻은 야자만은 30척의 함대를 꾸려 그리스의 칼키스 ([[에우보이아]] 섬)까지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지역 수비대에게 격퇴되었다. 그에 굴하지 않고 886년 초, 야자만은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동로마 영토를 습격하였고 역사가 알 타바리에 의하면 '사상자 없이' 많은 재물과 포로와 함께 귀환하였다고 한다. 그해 여름엔 4척의 동로마 선박들이 야자만에게 나포하기도 하였다.야자만은 890년, 계속된 권유에 결국 이집트의 툴룬 왕조로 주군을 바꾸었다. (890년) 891년 10월, 야자만은 툴론 조의 장군 아흐마드 이븐 투간과 함께 동로마 제국을 침공, 안탈리아로 향하는 관문인 셀리누스 (트라야노폴리스)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10월 22일에 야자만은 수비대의 투석기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중상을 입고는 다음날 사망하였다. 원정군은 철수하였고 야자만은 '지하드 문'에 매장되었다. 타르수스의 영웅 야자만은 이슬람 세계가 분열되고 쇠퇴하던 시기에 연이은 승리로 명성이 높았다. 동로마 교회에서 그 용기를 인정하여 초상화를 그려준 10명의 무슬림 장군 중 하나였다. 이후 아흐마드가 타르수스의 총독이 되었다. 그러던 896년 툴룬의 아들 쿠마라와이가 다마스쿠스에서 암살되며 툴룬 조는 후계자 다툼으로 혼란에 빠졌다. 따라서 타르수스는 어렵지 않게 압바스 칼리파의 직할령으로 회수되었다. (897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