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르수스 (문단 편집) ==== 제국의 역습 ==== 그러나 10세기 초반 압바스 조는 재차 쇠락하였고 타르수스는 935년 이집트의 [[익시드 왕조]]에 소속되었다. 다만 그 지배는 느슨하였고 10여년 후 944년 알레포를 장악한 사이프 알 다울라의 [[함단 왕조]]가 타르수스의 새 주인이 되었다. (946년) 사이프는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란 뜻을 세워 야자만 사후 소강 상태였던 동로마에 대한 습격을 재개, 이코니움 ([[콘야]])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국의 역습은 이제 시작이었다. 945-46년의 원정이 실패로 귀결되자 사이프 앗 다울라는 몇년간 공세를 멈추었다. 그러자 948년과 949년에 역으로 동로마 군대가 [[함단 왕조]]를 공격하여 마라쉬를 함락하고 안티오크 근교까지 약탈하였다. 이에 950년, 사이프는 재차 공세에 나섰으나 동로마 장수 [[레온 포카스]]에게 8천을 잃으며 대패하였다. 사이프는 동로마 측의 평화 제안을 거절하였고, 951년 [[대 바르다스 포카스]]가 이끄는 제국군이 킬리키아 일대를 습격하였다. 이후로도 953-55년에 몇차례 바르다스가 킬리키아를 습격해 왔으나 수비에 일관한 사이프로부터 타르수스를 빼앗진 못하였다. 이에 바르다스 대신 그의 아들이자 레온의 형인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사령관이 되었다. 자신감을 얻은 사이프는 956년에 오랜만에 타우루스 산맥을 넘었다. 그러자 동로마 장수 [[요안니스 1세|요안니스 치미스키스]]가 킬리키아로 침투하며 그의 퇴로를 차단하려 하였는데, 양측 간의 벌어진 전투에서 요안니스는 4천을 잃으며 패하였다. 하지만 그 사이에 레온 포카스가 시리아 북부를 침공하였고 사이프의 사촌 아불 아시르를 패배시켰다. 957년 6월, 니키포로스는 타우루스 산맥의 관문인 하다스 요새를 파괴하였다. 이로써 주도권은 동로마로 넘어왔다. 958년 요안니스가 남하하여 [[다라]]를 점령하였고 함단 조의 장수 나드자 휘하의 1만 군대를 격파하였다. 959년에는 레온 포카스가 현 시리아 서북변에 위치한 키루스까지 약탈한 후 회군하였다. 960년, 니키포로스가 크레타 정복에 나서며 전선에서 이탈하자 사이프는 지하드 (성전)을 선포하며 분위기 반전을 노렸다. 그라나 레온 포카스가 재차 남하하였고 사이프와 직접 대결을 피하고 동로마 습격 후 복귀하던 알리 이븐 함단의 군대를 기습하여 괴멸시켰다. 한편, 이듬해 니키포로스는 성공적으로 크레타를 정복한 후 아랍 전선으로 복귀하였다. 그러자 961년 이분 앗자야트의 반란이 일어날만큼 함단 왕조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해 말 니키포로스는 킬리키아 동북부의 아나자르부스를 점령한 후 이듬해 부활절에 회군하였다. 위기를 느낌 사이프는 직접 킬리키아의 수비를 맡았다. 이에 니키포로스는 사이프가 없는 시리아로 진로를 변경하였다. 962년 가을, 7만 대군으로 남하하여 마라쉬를 점령하곤 시리아 북부로 향하였다. 만비즈 등 알레포와 [[하란]] 사이 일대를 평정한 니키포로스는 마침내 12월 중순 함단 왕조의 수도 [[알레포]]를 포위, 함락한 후 엄청난 약탈물과 함께 회군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시리아 정복이 시간 문제로 보이던 963년 로마노스 2세가 어린 자녀를 남긴채 요절한 후 벌어진 내전 때문에 전선은 오랜만에 평화로웠다. 그럼에도 함단 왕조는 히바탈라와 나드자의 연이은 반란으로 이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소규모 공세도 요안니스에게 분쇄되었고 그의 반격으로 킬리키아의 모프수에스티아 요새가 포위되었다. 마침내 태후 테오파노와 결혼하여 황제가 된 [[니키포로스 2세]]는 킬리키아 정복에 나섰다.964년 가을, 니키포로스는 4만 정예군을 이끌고 대대적인 약탈전과 함께 진격하였다. 아나자르부스와 아다나가 함락되었고 모프수에스티아 요새가 포위되었다. 후방의 [[카이세리]]에서 월동한 니키포로스는 965년 봄, 킬리키아의 중심 도시 타르수스로 향하였다. 성벽 밖에서 아랍 군대를 격파한 그는 도시를 물샐틈 없이 봉쇄한 후 모프수에스티아 요새로 향하였다. 궁수들과 공성병기들이 수비대를 괴롭히는 동안 공병들이 땅굴을 파서 성벽을 무너뜨렸고, 그대로 요새는 함락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타르수스 시민들은 시리아로의 철수 보장을 조건으로 항복을 제안하였고 니키포로스는 이를 수용하였다. 떠난 주민들은 시리아 해안의 [[바니야스]]에 정착하였고, 남은 이들은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모스크는 허물어지거나 마굿간으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250여년만에 타르수스는 동로마 영토가 되었고 킬리키아 테마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한세기가 흐른 11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은 재차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1068년에 [[콘스탄티노스 10세]]가 어린 아들 [[미카일 7세]]를 남기고 사망하자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유능했던 [[로마노스 4세]]를 옹립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의 동생 [[요안니스 두카스]]는 새 황제와 대립하였고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가 도주해버리며 제국군은 대패하였다. 이로써 미카일 7세가 단독 황제가 되었는데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 로마노스를 풀어주며 내전이 발발하였다. (1072년) 로마노스는 도키아 전투에서 정부군에 패하자 자신을 따르던 [[안티오키아]] 총독과 함께 킬리키아로 후퇴하였다. 하지만 안드로니코스가 기습적으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타르수스를 점령하며 대세는 기울었고 아다나에 있던 로마노스는 항복하였다. 이후 안전 보장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을 뽑힌 후 곧 사망하였다. 명군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한 후에도 제국은 노르만과 페체네그의 침공에 시달렸고, 그틈에 튀르크 인들이 타르수스를 장악하였다. (1085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