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모리 (문단 편집) === 후쿠오카 시절 === [[1968년]] 대학 동아리 매니저를 그만둔 타모리는 아사히 생명에서[[ 보험설계사]]로 근무했으며, [[1970년]] 동료였던 2살 연상의 일반인 여성과 결혼했다. [[1971년]], 타모리는 부인과 함께 아사히 생명에서 퇴사하고 고향 하카타로 돌아와서 [[볼링|볼링장]], [[우동]] 가게[* 타모리는 "후쿠오카를 대표하는 면요리는 돈코츠 [[라멘]]이 아니라 하카타의 [[우엉|고보텐]] [[우동]]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타모리의 말에 의하면 "강한 탄력을 지닌 면의 쫄깃한 식감이 특징인 사누키 우동과는 정반대로 하카타의 고보텐 우동은 면을 최대한 부드럽게 삶아 입안에서 면이 사르르 녹는 맛을 즐기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등을 열었으나 모두 망했다. 이후 타모리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자신이 [[재즈]]와 [[커피]]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장점을 살려서 [[카페]]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1972년]], 타모리의 인지도를 연예계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날, 타모리는 대학교 때 같은 동아리였고 지금은 재즈 연주자 [[와타나베 사다오]]의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는 회사의 직원인 친구와 그가 묵고 있던 호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만취한 타모리는 막차 시간대가 가까워가자 친구와 헤어지고 호텔 복도를 거닐다가 열려있는 방 안에서 와타나베의 콘서트에 동행한 재즈 연주자 그룹인 야마시타 요스케 트리오(야마시타 요스케, 나카무라 세이치, 모리야마 타케오)가 [[가부키]] 춤을 흉내내거나 콩트 등을 하며 신나게 놀고 있는 것을 목격, 그곳에 난입하여 나카무라 세이치 주변에 있던 휴지통을 가면 삼아 가부키를 추기 시작했다. 곧 나카무라가 재치있게 타모리의 무례를 어설픈 [[한국어]]로 지적했고 타모리는 더 잘하는 어설픈 한국어로 이를 받아쳤다. 이윽고 타모리와 나카무라의 엉터리 외국어 대결이 시작되었다. 타모리가 표정까지 흉내내며 엉터리 아프리카어를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야마시타는 호흡 곤란이 될 정도로 웃었다고 한다. 첫차가 나오는 시간까지 신나게 논 타모리는 자신의 성씨인 '모리타'만 말해주고 돌아갔다. 이후 자신의 얼굴을 알아봤으니 타모리가 재즈 팬이 틀림 없다고 확신한 야마시타는 하카타의 재즈 바에서 '모리타'라는 이름의 남자를 수소문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어떤 재즈 바에서 '주인이 4차원인 것으로 유명한 카페가 있는데 그 카페 주인 이름에도 모리타가 들어간다.'라는 정보를 듣고 둘은 재회한다.[* 상술하다시피 타모리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커피에 [[비엔나 소시지]]를 곁들인 간단한 식사 메뉴를 메뉴판에 [[카페 아인슈패너|비엔나커피]]라고 적는 등 괴짜 주인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재회 후 야마시타 트리오는 큐슈에 갈 때마다 타모리의 카페를 방문하여 같이 놀게 되고, 트리오의 소개로 타모리는 연예인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해져서 급기야 [[1975년]]부터는 타모리가 한 달에 한번 도쿄로 상경하여 개그를 펼치는 '전설의 큐슈 남자 모리타를 만나는 모임'이 열리게 된다. [[파일:external/41.media.tumblr.com/tumblr_lxmkqohH0D1r9l7xlo1_500.jpg]] 타모리와 아카츠키 후지오 [[1975년]], 야마시타 트리오의 추천으로 개그 만화가 [[아카츠카 후지오]]가 모임에 참여하였고 소문으로만 듣던 타모리의 즉흥 개그를 직접 보고 감탄한 아카츠카는 그해 8월 말 생방송이 있었던 자신의 프로그램에 그를 출연시키기로 결정, 타모리는 <만화 대행진 아카츠카 후지오 쇼>([[1975년]] [[8월 30일]] 방송)에서 일반인 신분으로 난생 처음 TV에 출연하게 된다. 운좋게도 이때의 그를 아카츠카 후지오의 절친이자 토크쇼 진행자인 [[쿠로야나기 테츠코]][* 1933년생으로 1953년에 데뷔한 일본 최초의 TV 탤런트 중 하나. 유명한 책으로 <[[창가의 토토]]>가 있다.]가 보고 "저렇게 웃긴 사람이 왜 여태 개그맨으로 데뷔하지 않았지?" 하고 생각하여 타모리를 자신의 토크쇼에 게스트로 섭외, 2번째로 TV에 출연하게 된다. 해당 방송에서 타모리는 엉터리 외국어 흉내를 TV에 최초로 선보였고 일약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타모리의 개그 스타일이 너무 이질적이라고 판단한 예능 전문 기획사들은 타모리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고[* 당시 유명 배우로 시작하여, 버라이어티의 진행자나 개그 방송의 레귤러로 활약했던 사카이 마사아키도 타모리의 개그 스타일이 과연 방송에서 먹힐까 의문을 가졌기 때문에 타모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는게 나을것이다"라고 쓴소리를 했다고 한다. 후에 타모리가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자, 그 이후로 타모리를 만날때마다 존칭으로 부른다고.] 타모리 본인도 카페가 그럭저럭 잘 되고 있었기에 별 미련없이 하카타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자 개그 만화의 1인자로 불리는 만화가인 아카츠카는 "카페를 처분하고 도쿄로 상경하여 연예인 데뷔를 준비하자. 그 동안은 내 집에 있어라. 네가 성공할 때까지 내가 한달에 2~30만엔씩 생활비도 주겠다."라며 타모리를 설득하였고 결국 타모리는 심사숙고 끝에 아카츠카의 제안에 응하여 자신의 부인과 함께 도쿄로 이주하게 된다. 아카츠카 후지오는 왜 타모리를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돌봤냐는 질문에 타모리가 웃기기도 했지만 자신의 어머니처럼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도와야한다는 사명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아카츠카는 타모리의 매니저를 자처해서 약 9개월 동안 소속사를 찾아다녔고, 마침내 타모리는 타나베 에이전시와 계약에 성공한다. 타나베 에이전시는 [[1973년]] [[호리프로]] 매니저 출신의 타나베 쇼지가 [[호리프로]] 소속 연예인들 일부를 데리고 독립하여 설립한 회사로 본래 [[The Alfee]] 등 가수가 중점적으로 소속되어 있는 회사였지만 타모리를 시작으로 예능 분야에도 진출할 수 있었다. 참고로 타모리는 연예계 데뷔가 확정되고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진출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4개의 계명을 스스로 만들었다고 한다. 1.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 "나의 웃기는 능력은 다른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얻은 것이 아니기에 나도 남에게 가르칠 것이 없어서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고 밝혔다. 다만 1982년 타모리는 아키츠키 후지오와 함께 <[[스타 탄생!]]>의 자매 프로그램인 <개그맨 스타 탄생>의 심사위원으로 출연, 자신들은 재밌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심사위원들은 [[톤네루즈]]의 개그에 악평을 하자 톤네루즈를 그랑프리 수상자로 적극 추천하며 이들을 본격적으로 방송가에 데뷔시켰다. 이 때문에 [[톤네루즈]]는 "<개그맨 스타 탄생>에 출연하기 전부터 타모리 씨를 '동경'하고 있었지만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프로 게닌으로 데뷔한 후 부터는 타모리 선배를 '숭배'하기 시작했다."고 발언하는 등 타모리를 일본 연예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은인으로 밝히고 있다. 톤네루즈는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의 인기 코너 텔레폰 쇼킹의 최다 출연자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외에 [[폭소문제]]도 [[오오타 프로덕션]]에서 독립한 후 암흑기를 보내고 있다가 타모리가 진행하는 『 타모리 클럽』, 『 타모리의 SUPER 어휘 천국 』에 출연하여 다시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방송에서 늘 타모리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다.][* 이게 당시에는 파격적인 게, 동서 불문하고 당시 오와라이 업계에서는 스승과 제자 관계가 널리 퍼져 있었던 시절이었고 아직 [[요시모토 흥업]]의 요시모토 종합 예능학원도 개교하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다.] 2. 조직에 속하지 않는다. 3. 방송 출연시에는 항상 당당한 태도를 유지한다. 4. 사인을 해줄때는 사인 외에 다른 말을 적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