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이완섬/역사 (문단 편집) === 조기대만시기 === [[스페인 제국]], [[네덜란드 제국]]의 타이완 섬 통치 시대부터 [[동녕 왕국]] 통치 시대까지를 보통 조기대만시기(早期臺灣時期)라고 한다. 중국 대륙에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타이완 섬은 원주민들의 부족 국가들을 비롯한 여러 소왕국들이 존재하였다. 한편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서구권]] 열강들도 세계 각지에 세력을 뻗기 시작했고 이들은 [[동아시아]]에도 당도했다. 이 과정에서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아시아에 대한 권리를 얻은(?) [[포르투갈 제국]]의 항해사들이 [[유럽인]] 중 처음으로 [[타이완 섬]]의 존재에 대해 알렸고, 이들은 이 섬을 포르투갈어로 아름다운 섬이란 뜻의 '일랴 포르모자(Ilha Formosa)'라 하였다. 이 명칭은 현재에도 타이완 섬을 이르는 별칭으로 쓰인다. 15세기에 [[대항해시대]]가 도래하면서 서양 세력에게도 원주민들의 존재가 알려졌다. [[타이완 섬]]을 처음으로 찾은 유럽인들인 포르투갈 항해사들은 [[포르투갈 제국]]의 국가 역량 한계로 인해[* 이 시점에서 포르투갈 인구는 200-250만 명에 불과했다.] 이 지역을 식민화할 생각은 없었고, 대신 그곳의 원주민들이나 한족들과 약간의 교역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다 [[1624년]]에는 [[네덜란드 제국]]이 [[펑후]] 열도와 [[타이난]]에 당도하였다. 이들은 [[타이난]]에 질란디아 요새를 쌓고, [[펑후]]에는 포대를 구축해 거점으로 삼고자 했는데 [[펑후]]의 포대에 대해서는 [[명나라]]가 자국 영토라고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오래 있지 못하고 밀려났다. 지역 원주민들은 이들에 호의적이지 않아 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원주민들보다 우수한 무기를 지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이길 수는 없었고, 이내 [[타이난]], [[가오슝]], [[핑둥]], [[타이둥]] 일대 등을 세력권 안에 넣어 원주민 부족들과 오래 전에 타이완 섬에 정착한 한족들을 노예로 착취한다. 네덜란드인들은 타이완 섬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해 수출하여 이득을 얻었으며[* [[1653년]] 타이완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조선에 표류한 [[헨드릭 하멜]]이 타고 있던 선박 스페르베르호에는 대량의 설탕이 화물로 실려 있었다고 하여 당시 타이완의 주 교역 상품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다른 화물로는 목향(약재의 일종), [[명반]], [[용뇌]], 사슴·산양·영양 등의 [[가죽]] 등이 있었다고 한다.]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명나라]] [[푸젠 성|복건]] 지역에서 한족 노동력을 수입했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첫 [[한족]]의 타이완 섬 진출 및 한족과 원주민의 첫 공생이 되었다.[* 여기서 스페인어, 네덜란드어를 배운 한족들,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중국어를 배운 원주민들이 생겨났다.] 네덜란드인들은 일부 한족들을 하급 관리로 기용해 원주민을 통제하거나 세금을 거두는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한편 네덜란드로부터 선교사들이 들어와 교회 등을 세우고 이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스페인 제국]] 역시 [[1626년]]에 [[타이베이]], [[신베이]], [[지룽]], [[단수이]] 등에 당도하여 요새를 구축하고 타이완 섬 북부를 지배했다. 그렇게 남북에서 유럽의 두 국가 세력들이 중서부의 다두 왕국을 압박해왔다. 그러다 당시 견원지간이었던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타이완 섬에서 세력을 다투었고, [[1642년]]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타이완에서 몰아낸다. 이후 [[1644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군대가 대만 북부의 케타갈란족(凱達格蘭族)을 공격해 무찌르는데 성공한 후 남쪽으로 진격하여 다두왕국을 공격하였지만 다두 왕국의 원주민 부족 동맹 연합이 네덜란드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다. 그러나 1642년 8월 네덜란드는 한때 스페인이 식민지화 해서 차지한 대만 북부와 본인들이 차지한 남부를 연결하기 위해 서부 평원의 원주민 정복을 목표로 삼았다. 1644년에 네덜란드의 선장 피터 분(Piter Boon)은 북부 지역의 순종하지 않은 원주민 토벌을 위해 네덜란드 원정대를 이끌었고 그 다음해인 1645년 다시 다두 왕국에 두번째 공격을 감행하여 다두 왕국의 통치를 받고있던 반네덜란드 성향의 13개의 부족 마을을 파괴하자, 당시 18개의 다른 부족 촌락의 지도자였던 다두 왕이자 파포라족의 카마찻 아슬라미에(Camachat Aslamie)에는 즉위 말기에 파포라족을 이끌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결국엔 어쩔 수 없이 부족의 안전과 평화회담을 위해 사이먼 반 브린(Simon van Breen) 목사의 중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으며 네덜란드에 무릎을 꿇고 네덜란드가 주최하고 있는 노스 로드 회의에 참석한다. 그리고 [[1645년]] 4월에 아슬라미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남부 지방 회의에 참석하였고 네덜란드는 무력으로 굴복시킨 아슬라미에한테 강제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항복 조약을 서명 및 체결하게 만들어 다두왕국이 네덜란드에 항복하고 복종했음을 명시하여 다두왕국을 [[속국]]으로 삼고 한때 스페인이 지배했던 북부를 비롯한 대만 섬 전부를 점령하고선 본격적으로 모든 원주민 부족들과 오래 전에 타이완 섬에 정착하거나 수입한 한족들을 노예로 착취한다.[* 여기서 스페인어, 네덜란드어를 배운 한족들,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중국어를 배운 원주민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아슬라미에는1645에 우강(烏溪) 유역 지대를 중심으로 다자시(大甲溪) 남쪽 기슭에서 동루어시(東螺溪) 북쪽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리며 여전히 다두 왕의 칭호를 유지하면서 다두 왕국을 반독립 왕국으로 계속 통치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역시 아슬라미에의 사후, 다두왕국의 세력과 영향력을 약화시키는데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한편 [[중국 대륙]]에서는 1644년 [[청나라]]의 공격으로 명이 몰락하자 [[정성공]]이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을 [[남명]]의 2대 황제인 [[융무제]](隆武帝)로 옹립하여 청에 대항하였고, 한때 명나라의 고도 [[난징|남경]](南京)까지 진격하여 포위하는 등 잘 나가다가, 결국 청군에 패하고 복건성 해안가의 근거지 [[금문도]]로 밀려나게 된다. [[파일:external/www.fjsen.com/002564aac91611a6b7c505.jpg]] 정성공은 평생을 [[명나라]] 부흥운동에 바쳤고 명나라의 옛 도읍 난징을 거의 되찾을 뻔 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17세기 중반 대륙에서 명나라가 망하고 새로이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서자 정성공은 청나라의 해안 봉쇄에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명나라]] 부흥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거점으로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대만 섬]]을 노렸다. 1661년 4월 29일에 [[타이난]]을 공격[* 프로빈티아 요새, 제일란디아 요새], 네덜란드령 대만의 반네덜란드파의 원주민들, 한족들과 함께 동맹을 맺고 봉기하여 네덜란드 세력을 공격해서 질란디아 요새를 점령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지원군도 격파하여 인프라를 통째로 빼앗고[* 이후 네덜란드군이 질란디아 요새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이번에는 질란디아 요새 성벽이 네덜란드 공격군에게 핸디캡이 되면서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대만 남서부를 차지해 그곳에 근거지를 마련하고는 [[동녕 왕국]]([[명정(동녕 왕국)|명정]])을 건국하였다. 이때 포로로 잡은 수백 명의 네덜란드 남성을 고문, 학살하고 여성들은 노예로 삼았다.[* 정성공 자신도 전직 네덜란드 관료였던 선교사 Antonius Hambroek를 참수하고 그의 딸인 백인 소녀를 첩으로 삼기도 했다.] [[강희제]]는 이에 맞서 해안의 5개 성 백성들을 해안에서 20km 떨어진 '''내륙으로 옮기고 그 이상 넘어서 바닷가 가까이로 가는 사람들은 무조건 처형한다'''는 천계령(遷界令)을 내려 대응했지만[* 이 천계령을 제의한 것이 정성공의 부하로 청에 투항한 황오(黃梧)라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대만 섬에는 한족들이 개간한 차밭에다가 원주민들이 재배한 [[사탕수수]]를 가공할 공장도 있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한편으로 [[네덜란드]], [[스페인]], [[동녕 왕국]] 모두 타이완 섬 전부를 지배하던건 아니고 서남부나 항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다두 왕국]]을 비롯한 원주민의 영역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37px-Dutch_and_Spanish_Taiwan.png]] 17세기 초반의 타이완 섬. 연두색이 [[스페인 제국]], 분홍색이 [[네덜란드 제국]], 주황색이 [[다두 왕국]]의 영역이다. 한족들은 동녕 왕국에 흡수되었으며 동녕 왕국은 융화정책을 실시하여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들지 못한 대만 원주민들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쓰며 다두 왕국을 통해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고 이들에게 농사, 중국어, 사냥, 덫이나 옷 등의 물건제작을 가르쳐 주는 등 적당한 주변 관계를 맺어 이들의 협조를 통해 청나라에 대한 항쟁체제를 세우는 것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661년에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영토까지 침범하여 그로 인해 동녕 왕국과 남부의 평포족 간의 갈등이 생겨났고[* 이때 다두 왕국의 전사였던 대만 중부 지역 출신의 파포라족 아 텍 카우종(阿德狗讓 / 1592년-1661년)이 정성공의 원정으로 파견된 두 장군의 매복전술에 살해당했다.] 원주민들을 좀더 세력권 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반항하는 원주민들은 탄압해 학살하거나 세력권 안에 있는 원주민들을 착취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녕 왕국과 원주민들 간의 갈등 끝에 [[사록사 전투]]가 일어났다. 또한 정성공은 [[동녕 왕국]]을 세우면서 청나라와는 독립적인 사회 제도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대만 원주민들에게도 한족의 [[유교]]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대만은 동북아시아사로 편입되었다. 이후 정성공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타이완 섬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청나라]]에게 반기를 들어 청나라와 잦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683년]] 7월, 청나라와 동녕 왕국 사이에 벌어진 [[펑후해전]](澎湖海战)에서 동녕 왕국의 해군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동녕 왕국은 더이상 청나라에게 저항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동년 10월 청나라에게 항복하면서 동녕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