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치바나 (문단 편집) == 역사 == [[아스카 시대]] 말기의 궁녀였던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県犬養 三千代)[* [[비다츠 덴노]]의 후손으로 알려진 미누 왕과 결혼해 가쓰라기 왕과 사이 왕 두 아들을 두었고, 나중에 [[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 재취해서 [[코묘 황후|후지와라노 고묘시]]를 낳았는데 이 고묘시가 [[쇼무 덴노]]의 황후가 된다.]가 [[겐메이 덴노]]로부터 '''귤나무 가지가 장식된 잔'''을 하사받았던 것에서 유래한 [[우지(성씨)|성]]으로, 미치요의 두 아들인 가쓰라기 왕과 사이 왕이 [[신적강하]]를 하면서 조정에 청원해서 어머니의 타치바나 성을 이어받아 각기 [[타치바나노 모로에]](橘 諸兄)와 타치바나노 사이(橘 佐爲)로 이름을 바꾸었다. 타치바나의 기원은 '''모계로부터 물려진 성씨'''인 것이다. 타치바나 중에 유명한 인물로는 [[헤이안 시대]] 극초기 일본 역사상 유일한 타치바나 출신의 황후였던 단린황후 [[타치바나노 카치코]]가 있다.[* [[후지와라노 에미노 오시카츠|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정적이었던 타치바나노 나라마로의 손녀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라마로가 죽고 난 후에 카치코가 [[사가 덴노]]의 황후가 되었고,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몰락하여 나카마로가 박탈당한 정1품의 직위가 죽은 나라마로에게 주어졌다.] [[헤이안 시대]] 초기에 [[후지와라]]씨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등용되었으나, 곧바로 후지와라의 전성기가 열리자 쇠퇴를 거듭해 지금은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이때문에 국내 교육과정(세계사, 동아시아사)에서도 헤이안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후지와라씨, [[겐페이 전쟁|막부 성립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미나모토씨와 타이라씨에 비해 비중이 매우 낮은 편이다. 타치바나씨의 후손이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징비록]]에 나오는 [[타치바나 야스히로|귤강광]](橘 康廣)[* 유즈야 야스히로. [[쓰시마]]에서 온 일본의 사신으로 "조선의 창은 참 짧군요"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또 연회에서는 술에 취한 척 후추를 마구 바닥에 뿌려댔는데 이에 사람들이 허둥지둥 주워대는 모습을 보며 "니네 나라는 곧 재난이 닥치겠다. 정신 상태가 이 꼬라지니까" 라고 했다. 하지만 조선이 사신 파견을 거부하는 바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서 일본으로 귀국한 후 일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이나 귤진중(橘 眞重),[* 다다 요자에몬. [[쓰시마]] 도주의 명을 받아 조선에 와서 [[울릉도]]가 일본의 ‘다케시마’라고 주장하면서 조선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해 달라는 요구했다.] [[남북조 시대]]에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고, [[고다이고 덴노]]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쳐 충의의 상징이 된 [[구스노키 마사시게]]도 타치바나를 [[우지(성씨)|본성(本姓)]]으로 자처했다. 현재도 타치바나씨 성을 쓰는 사람이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