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탄옌카이 (문단 편집) === [[계축전쟁]]에서 [[호법전쟁]] === [[위안스카이]]의 임시 대총통 취임 이후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 3독 해직 사건 등의 정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탄옌카이는 성재정 상태가 좋지 않고 호남의 군사력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관망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계축전쟁]]이 발발하자 1913년 7월 25일, 국민당의 압력으로 호남성의 독립을 선언했다. 허나 강서, 사천의 혁명군이 잇달아 패하면서 8월 13일 독립을 취소했다. 이 일로 위안스카이에게 찍힌 탄옌카이는 1913년 10월, [[차오쿤]]의 3사단을 비롯한 북양군이 악주에 남하한 상태에서 도독에서 해임되고 북양군벌 탕향명이 도독이 되었다. 이후 호남은 3년 동안 북양군벌의 통치를 받았으나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면서 [[호국전쟁]]이 발생, [[청첸]]을 비롯하여 호남을 떠난 과거 호남군의 장령들이 대거 복귀하여 반원운동을 전개하면서 북양군벌이 호남에서 축출되고 탕향명은 1916년 7월 5일 도주했다. 이후 호남의 원로 유인회가 호남도독 겸 성장에 추대되었으나 본인이 고사하고 호남 출신 [[황싱]], [[차이어]] 등이 거론되었으나 그들 역시 모두 거절하고 대신 탄옌카이를 적극 추천하여 1916년 8월 4일 탄옌카이는 다시 호남도독 겸 성장에 추대되었다. 호남의 반발을 의식한 북양정부도 호남성장과 도독을 자신들이 임명하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고 탄옌카이를 승인했다. 다시 호남성을 지배하게 된 탄옌카이는 1916년 7월부터 9월에 걸쳐 다시 재병작업에 착수, 청첸의 군대를 정리하고 자오헝티 군대를 호남군으로 재편하면서 청첸을 숙청하고 [[돤치루이]]의 지방군 정리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이 신뢰하는 자오헝티를 중심으로 한 군대를 잔존시켰다. 또한 호국전쟁 과정에서 조직된 여러 민군을 조직하여 전문적 군대로 재편했다. 이 시기에 [[탕성즈]], [[루디핑]], 예카이신 등 [[상계군벌]]의 중요 인물들이 대대장, 연대장을 거치면서 성장했다. 그러던 중 1917년 8월, 돤치루이가 자신의 측근인 육군부 차장 [[푸량쭤]]를 호남독군에 임명하면서 1917년 9월 탄옌카이는 성장을 사직하고 상하이로 떠나야 했다. 이어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호남성은 호법군과 북양군의 전쟁터가 되어 전란으로 인해 극도로 황폐화되었다. 돤치루이는 새로운 호남독군으로 [[장징야오]]를 임명하였는데 이때 탄옌카이는 자신이 공을 세우고도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해 돤치루이에게 불만을 품은 [[직예군벌]]의 [[우페이푸]]와 접촉하여 호남에서의 정전을 도모하였다. 탄옌카이의 중재로 5월 25일 상군의 각 대표와 직군의 각 대표가 담판하여 6월 15일 정식으로 정전협정을 체결함으로 호남에서의 싸움은 일단락되었다. 돤치루이는 우페이푸를 대신하여 [[니쓰충]]을 파견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1918년 5월, [[전계군벌]] [[탕지야오]]와 [[계계군벌]] 루룽팅, 정학회 정객 [[천춘쉬안]]이 결탁하여 남방 군정부를 대원수제에서 7인 총재제로 개편했고 실망한 [[쑨원]]은 광저우를 떠났다. 1918년 8월 21일, 천춘쉬안이 수석총재에 취임하자 우페이푸는 [[펑궈장]] 앞으로 내전 중지를 호소하는 통전을 보냈고 이어 천춘쉬안이 찬성 통전을 보내면서 탄옌카이, 청첸 등 호남의 실력자들도 연명으로 화평통전을 보내면서 상계군벌은 한동안 직예군벌과 협력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런 남북화평의 분위기에 편승한 탄옌카이는 계계군벌, 직예군벌과 11월 28일 구국동맹군조약을 체결하고 계계군벌의 지지를 받아 영주에서 재야독군에 취임, 영주행영을 설치하면서 다시 한번 호남의 권좌를 꾀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