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탄옌카이 (문단 편집) === [[5.4운동]]과 구장운동 === 이후 호남에서 탄옌카이는 상군총사령관 청첸과 대치하면서 호남의 패권을 다투었다. 1919년 6월 청첸이 북양정부와 내통하여 광저우의 호법정부를 전복하려고 시도한 밀서가 적발되면서 자오헝티 등 상군의 주요 장령들은 청첸이 적과 내통했다고 비난하며 그와 단절했고 청첸은 호남을 떠나야 했다. 이 사건 덕분에 청첸의 휘하 병력은 상군 1사단장 자오헝티가 흡수하였으며 1919년 7월, 탄옌카이는 우페이푸의 양해를 얻어 광동군정부에 의해 상군 총사령관 겸 호남독군에 취임하여 북양정부가 임명한 [[장징야오]]와 대치하였다. 탄옌카이는 청첸과 탄옌카이 어느 쪽에도 충성하지 않던 호남 서부군벌들을 차례로 진압하며 1919년 11월 즈음에 장징야오가 지배하는 지역을 제외한 전 호남성을 장악했다. 하지만 탄옌카이는 과거의 문치독군에서 군사실력자로 거듭났음에도 장징야오를 축출할 정도의 힘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1919년 [[5.4운동]]이 벌어지면서 호남성의 세력균형이 깨졌다. 장징야오는 호남성에 가혹한 수탈과 폭력정치를 자행하였으며 농민협회, 공인협회, 교육협회, 성의회를 모두 자신의 측근들이 장악한 어용기관으로 만들었고 교육경비를 군비로 횡령하는가 하면 은행을 통해 지폐를 남발하여 호남성 인민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또한 호남성의 중요한 자원들을 마구 매각하여 호남성 인민들의 분노를 샀다. 결국 학생들을 중심으로 호남의 각계 단체들이 [[5.4운동]]에 호응하여 반일운동을 벌였는데 장징야오 정권이 이를 무력으로 탄압하자 분노한 호남인들의 반일구국투쟁은 반장징야오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1920년 5월 16일 장사에서 호남인민선언문이 발표되어 장징야오 타도를 선포했다. ||장징야오는 병(兵)을 이끌고 호남에 와서 시민, 학생들과 싸우고, 그 악질 측근들이 장사를 누비며 암살과 착취를 일삼았다. 장징야오가 하루라도 빨리 죽지 않으면 우리 호남인은 하루도 살수가 없다. 호남인의 이같은 비참함에 이른 이유를 따져보면 그 원인이 군벌에서 비롯되어 우리 인민을 초래한 것이다. 우리는 자연히 깨닫는다. 호남은 현재와 미래의 호남지역에서 정당한 직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호남이다. 호남의 일은 마땅히 전체 호남 인민들이 자결해야 하니, 이 자결을 돕는 자는 호남인의 친구이고 이 자결을 방해하는 자는 호남의 원수라고 할 것이다.|| [[우페이푸]]와 [[펑위샹]]의 지원 아래에 장징야오를 축출하자는 구장운동이 적극적으로 벌어졌고 호남인민들은 탄옌카이와 호남서부 군벌, 심지어 계계군벌에게까지 도움을 청하며 장징야오 축출을 호소했다. 탄옌카이는 이에 즉시 응하여 [[우페이푸]], [[루룽팅]]과 연계하여 구장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우페이푸]]는 탄옌카이와 철병협정을 체결하고 [[안휘군벌]]과의 일전을 위해 호남에서 철수했고 철수하는 직계군을 따라 상군이 북상하여 주요 요충지를 차례로 점거하고 장징야오 정권을 공격했다. 장징야오는 2개 사단을 동원해 상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1사단장은 도주하고 2사단장은 전사하여 결국 6월 11일 장사를 버리고 악주로 도주했다. 6월 12일 상군이 장사를 점령하면서 장징야오 정권은 붕괴되었고 탄옌카이는 호남에 주둔한 모든 북양군벌에게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호법전쟁]] 이래 진주했던 펑위샹 등 직계, 환계, 봉계 군대가 모두 철수하였다. 장사에 입성한 탄옌카이는 호남독군, 호남성장, 상군총사령관 직을 독점하면서 제3차 탄옌카이 정권을 수립하여 호남 자치를 주장, 연성자치론을 내세웠다. 하지만 탄옌카이파의 독주는 상군 내부의 자오헝티파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