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탄옌카이 (문단 편집) === 국민당 합류와 [[담조전쟁]] === 호남에서 축출된 탄옌카이는 상하이에 은거했는데 [[쑨원]]의 [[중국 국민당]]이 호남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대표를 파견하여 접촉하는 한편 1922년 북벌을 선포하면서 탄옌카이를 북벌토역상군총사령관 겸 호남성장에 임명하였다. 이에 호남 내부에서도 북벌 호응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탄옌카이를 총사령관에 추대해야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탄옌카이가 상하이에 거주하는 동안 자오헝티는 탄옌카이에게 호남으로 돌아와 성정을 같이 맡자고 회유했으나 탄옌카이는 쑨원의 회유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자오헝티와 점점 더 대립하게 되었다. 1922년 6월 임시 약법과 구국회가 회복된 이후 대총통 리위안훙으로부터 내무총장에 추대되었으나 탄옌카이는 이를 거절했다. 얼마 후 [[영풍함 사건]]이 벌어져 쑨원이 상하이로 피신하자 1922년 늦여름, 탄옌카이는 쑨원과 회동하여 정식으로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였다. 이때 호남성장 선거에 출마하여 아직 호남 내부의 세력이 건재함을 보여주었으며 완전히 연성자치론을 포기하였다. 이후 [[쉬충즈]], [[양시민]], 유진환의 도움으로 천중밍이 축출되고 국민당이 다시 광저우롤 장악하자 탄옌카이는 쑨원과 함께 광저우로 남하하여 1923년 대원수부 대본영 비서장 겸 건설부장에 취임, 내무부장을 역임했다. 1923년 6월, 9.1 정변을 계기로 호남에 출병하여 [[담조전쟁]]을 통해 자오헝티를 몰아내고 호남성을 거의 장악할 뻔 했으나 [[우페이푸]]가 자오헝티를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면서 철수하여 광동정부에 완전히 귀속되었다. 이후 [[장덩쉬안]] 등과 접촉하며 봉천군벌과 국민당의 동맹을 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